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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한국사의 미스테리/고려의 역사

고려거란전쟁에서 서희 장군이 획득한 강동 6주의 진짜 위치에 대한 고찰 ②

by 캐쉰 2024. 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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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거란전쟁에서 서희 장군이 획득한 강동 6주의 진짜 위치에 대한 고찰 ①편에서는 우리들이 기본적으로 전제히고 있는 고려의 실제 영토가 한반도에 국한되어 있다는 고정관념을 타파해보고자 했습니다.②편에서는 고려 강동 6주의 실제 위치를 이해하기 위해선 기준이 되는 압록강이 어디인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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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압록강의 실제 위치

1-1.2개의 이름을 가진 2개의 압록강

1-2.맑은 압록강과 푸른 압록강

1-3.원서에 금사에 기록된 평양성과 압록강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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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압록강의 실제 위치

 

고려거란전쟁에서 서희 장군이 획득한 강동 6주의 진짜 위치에 대한 고찰 ②

 

 

고려 북계의 서북쪽 국경이 멸망 직전까지도 압록강이 아니라 그 너머인 요령성 요양시와 심양시 인근까지였음을 확인한 바 있는데 이 말은 곧 고려 국경이 된 압록강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북한과 중국 사이의 그 강이 아닐 수 있다는 걸 뜻합니다.제 1차 여요전쟁 이전에도 등장하는 압록강 강동 6주는 대략적으로 어느 정도 범위였을까?고려사 권 3 세가 3 성종 편에 기록된 성종 13년(서기 994년)의 기록을 보면 거란의 소손녕(蕭遜寧)이 고려 성종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엎드려 청하건대 대왕께서는 먼저 신하들을 지휘하시어
안북부에서 압강(鴨江) 동쪽에 이르기까지 280리 사이에 적당한 지역을 답사하고
성들 사이의 거리를 측량하게 하십시오.
아울러 일꾼들을 동원해 우리 측과 함께 축성을 시작할 수 있도록 분부해주시고
축성할 성의 수가 도합 몇 개인지를 빨리 회신해 주십시오.”

/고려사 권 3 세가 3 

 

이 기록을 통해 강동 6주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대략 짐작이 가능합니다. 보통 우리는 강동 6주라 하면 압록강 동쪽의 땅으로 아는데 소손녕은 압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압강과 압록강은 서로 같은 곳일까? 더 큰 문제는 서희(徐熙)의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획득하기 이전에 이미 압록강 일대가 고려 영토로 보이는 기록들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국사 교과서에 표기된 강동 6주 획득 이전 고려의 영토. 강동 6주 획득 이전 고려는 청천강 일대를 국경으로 하고 있었던 것으로 왜곡했다.(출처 : 네이버 이미지) 국사 교과서에 표기된 강동 6주 획득 이전 고려의 영토. 강동 6주 획득 이전 고려는 청천강 일대를 국경으로 하고 있었던 것으로 왜곡했다.(출처 : 네이버 이미지)

 

먼저 고려사 권 3 세가 3 성종 3년(서기 984년)의 기록에

 

“형관어사(刑官御事) 이겸의(李謙宜)에게 명하여 압록강(鴨綠江) 언덕에 성을 쌓아 보루로 삼게 하였는데
여진이 군사로서 저지하고 이겸의를 사로잡아 가니 군대가 궤멸되어 성을 쌓지 못했으며 돌아온 자가 1/3에 불과했다.”

/고려사 권 3 세가 3 

 

이 기록은 서희의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획득하기 10년 전의 기록입니다. 그런데 이미 이 때 고려는 압록강 언덕에 성을 쌓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이미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과는 다소 어긋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습니. 이런 의문스러운 기록은 성종 10년(서기 991년)에도 있는데 그 기록은 이렇습니다.

 

압록강 바깥의 여진족들을 쫓아내 백두산 바깥에서 살게 했다.
(逐鴨綠江外女眞於白頭山外居之)

 

압록강 바깥에 사는 여진족들을 백두산 바깥으로 몰아냈다는 기록으로 이 기록 또한 1차 여요전쟁 이전의 기록입니다. 국사 교과서에 나온 지도 상으론 고려의 영토는 백두산까지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기록을 볼 때 그 또한 틀렸다고 볼 수밖에 없는데 만약 국사 교과서 지도대로라면 여진족들을 백두산 이북으로 몰아냈다고 해도 별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최소한 1차 여요전쟁 이전까지 고려의 영토는 현재의 압록강~백두산 이남을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강동 6주 이전까지 고려 북쪽 경계였던 안북부 또한 실제 위치는 다른 곳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1-1.2개의 이름을 가진 2개의 압록강

 

고려거란전쟁에서 서희 장군이 획득한 강동 6주의 진짜 위치에 대한 고찰 ②

국사 교과서에 표기된 강동 6주 획득 이전 고려의 영토. 강동 6주 획득 이전 고려는 청천강 일대를 국경으로 하고 있었던 것으로 왜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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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압록강을 한자로 쓰면 우리는 아마 ‘鴨綠江’이라고 쓸 것이지만 옛 사서에는 다른 표기의 압록강이 등장합니다. 우선 강동 6주와 관련된 기록만 살펴보면 요사(遼史) 권 115 열전 45 이국외기(二國外記) 고려 조에는 강동 6주가 넘어간 것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통화(統和) 11년(서기 994년)에 왕치(王治, 고려 성종의 이름)가 박양유(朴良柔)를 보내 표를 올리고 사죄하므로
조서를 내려 여직국(女直國) 압록강(鴨淥江) 동쪽 수백 리의 땅을 주었다.
十一年王治遣朴良柔奉表請罪詔取女直國鴨淥江東數百里地賜之

 

위 기록에 나온 여직국이란 여진족을 말하는데 요나라 흥종(興宗)의 이름이 야율종진(耶律宗眞)이라 ‘참 진(眞)’자가 겹치기에 이 때부터 요나라에선 여진족을 ‘여직(女直)’이란 이름으로 기록했습니다. 이렇게 임금의 이름과 겹치는 한자를 다른 글자로 바꿔 쓰는 것을 피휘(避諱)라고 하는데 요사는 강동 6주의 기준이 되는 압록강을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鴨淥江’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그럼 鴨淥江과 鴨綠江은 서로 같은 강일까? ‘淥’과 ‘綠’은 발음은 같은 록이지만 뜻은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淥은 ‘맑다’는 뜻이고 綠은 ‘푸르다’는 뜻입니다.때문에 인하대학교의 윤한택 교수가 이 2개의 압록강을 맑은 압록강과 푸른 압록강이란 이름을 붙여 구분하기도 했습니다.

 

1-2.맑은 압록강과 푸른 압록강

 

고려사에는 압록강과 압강이란 강이 등장하고 요사에는 ‘鴨淥江’과 ‘鴨綠江’이란 강이 등장하는 셈입니다. 과연 이 두 강이 서로 같은 강인지는 더 따져 봐야 하지만 문맥으로 볼 때 고려사의 압강과 요사의 ‘鴨淥江’은 서로 같은 곳이라 봐야 할 것입니다.몽골 역사를 기록한 원사에서도 2개의 압록강이 나오는데 이 2개의 압록강이 어디인지 짐작하게 합니다. 먼저 원사 권 208 열전 95 외이(外夷) 1 고려 편에 실린 기록을 보면

 

강물이 있는데 말갈의 백산에서 발원하며 이름은 압록강(鴨淥江)이다.
평양성은 그 동남쪽에 있으며 그 강에 의지해 요새로 삼았다.
水有出靺鞨之白山者號鴨淥江而平壤在其東南因恃以爲險

/원사 권 208 열전 95 외이(外夷) 1 고려 편

 

 

이 기록에선 鴨淥江이 등장하고 평양성이 그 강 동남쪽에 있다고 했습니다. 얼핏보면 지금 북한의 평양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데 같은 책 권 59 지 11 지리 2 요양등처행중서성 동녕로(東寧路) 편에 적힌 기록은 뭔가 심상찮습니다.

 

동녕로는 본래 고구려 평양성이었고 또 장안성이라고도 했다. 한나라가 조선을 멸하고 낙랑, 현도군을 두었는데 이곳은 낙랑군의 땅이다. 동진(東晉) 의희(義熙) 이후에 그 왕 고련(高璉)이 비로소 평양성에 기거하였다.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해 평양성을 함락시키니 그 나라는 동쪽으로 옮겼는데 지금 압록수(鴨綠水)의 동남쪽 1,000여 리에 있는 것은 옛날의 평양이 아니다. 왕건(王建)에 이르러 평양성을 서경이라 했다.

 

동녕로란 1270년에 고려의 역적 최탄(崔坦) 등이 서경의 부, 주, 현, 진 등 60여 성을 들어 몽골에 갖다 바치자 몽골이 설치한 행정구역으로 원사는 동녕로가 본래 고구려 평양성이었던 곳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기록에는 “지금 압록수(鴨綠水)의 동남쪽 1,000여 리에 있는 것은 옛날의 평양이 아니다”고 못을 박고 있습니다. 즉, 고구려 평양성이자 몽골의 동녕로가 된 곳은 ‘鴨淥江’ 동남쪽에 있던 곳이었지 ‘鴨綠江’ 동남쪽에 있던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鴨淥江’과 ‘鴨綠江’이 다른 곳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鴨綠江’ 동남쪽에 있던 곳은 지금 북한의 평양을 말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이곳이 옛날의 평양 즉, 고구려 평양성이 아니라고 했으니 실제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도 다른 곳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1-3.원서에 금사에 기록된 평양성과 압록강 위치

 

고려거란전쟁에서 서희 장군이 획득한 강동 6주의 진짜 위치에 대한 고찰 ②

 

 

금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금사 역시도 압록강에 대해 묘한 기록을 남겼는데 먼저 금사 권 135 열전 73 외국 하 고려 편에 실린 고려의 영토 기록은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고려의 국왕은 왕해(王楷, 고려 인종의 이름)이다. 그 땅은 압록강(鴨綠江) 이동,
갈라로(曷懶路) 이남이며 동남쪽은 모두 바다에 이른다.
高麗國王王楷其地鴨綠江以東曷懶路以南東南皆至于海

 

압록강의 표기는 우리가 아는 압록강과 같은데 압록강 이남이 아닌 이동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과연 이 기록에 나온 압록강도 지금의 압록강일까? 무신정변 직후인 1174년에 서경유수였던 조위총(趙位寵)이 무신정권 타도를 외치며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 있었는데 이 때 조위총은 서경 예하의 40여 성을 금나라에 바치겠다며 귀순을 청한 바 있습니다. 당시 사건을 금사 권 7 본기 제 7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려시대 때엔 개경에서 서경으로 가려면 반드시 자비령을 넘어야 했는데 조선시대 때부터는 그런 기록이 없다. 그런데 지도를 보면 서경이 평양일 경우 굳이 자비령을 넘을 필요가 없다. 화살표로 표시한 길목을 따라 지금도 평양-개성 간 고속도로가 개통되어 있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신묘(辛卯)일에 고려의 서경유수 조위총이 그 임금을 배반하고 자비령 이서와 압록강(鴨淥江) 이동의 40개의 성을 들어 내부하기를 청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비령 이서와 압록강 이동 사이 지역에 조위총의 본진이었던 서경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또 압록강이 ‘鴨淥江’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보통 우리는 자비령이라면 황해도 황주군의 고개로 알고 있지만 서경이 지금 북한의 평양이고 압록강이 지금 북한과 중국 사이의 압록강이라면 큰 문제가 생깁니다. 자비령은 평양 남쪽에 있는 고개이고 평양은 압록강 남쪽에 있지 동쪽에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서경의 관할 지역을 표시하기 위해 예로 든 압록강 또한 지금의 압록강이 아니고 자비령 또한 황해도가 아닌 다른 곳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고려의 국경이 되었던 압록강은 ‘맑은 압록강’인 ‘鴨淥江’이자 고려사에 나온 압강(鴨江)으로 보입니다. ‘푸른 압록강’인 ‘鴨綠江’은 지금의 압록강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맑은 압록강’은 어느 강을 지칭하는 말인가? 맑은 압록강이 어디인지 그 위치를 알면 강동 6주의 위치를 더욱 자세히 알게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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