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을 보면 이야기가 산으로 가고있다 느낄만큼 내용이 역사왜곡으로까지 치닫고 있어 안타까울 뿐입니다.우리들에게는 조선의 임진왜란이 기록이 풍부하여 최대의 국난으로 인지하고 있지만 지금으로부터 1000천년 고려가 겪은 거란과의 3차에 걸친 전쟁 역시 어린 나이에 왕으로 오른 현종을 갖은 개고생을 하게만드는 몽진길에 떠나게하고 서희,양규가 거란의 1,2차 침입을 겨우 막아내고 마지막 3차 침입땐 강감찬이 막아내다못해 거란군을 절멸시키며 기나긴 고려거란전쟁을 종식시키며 이후 고려에는 100여년간의 평화와 전성기가 도래하기도 합니다.거란이 3차로 침입한 1018년에 강감찬은 기나긴 거란과의 전쟁을 확실하게 끝내버린 불멸의 영웅이기도 합니다.
목차
1.강감찬의 제 3차 고려거란전쟁 직위
1-1.강감찬은 누구인가
1-2.당나라 명장 곽자의와 강감찬의 닮은점
1-3.고려거란전쟁 승리 이후
1-4.제 3차 고려거란전쟁의 대회전
1-5.본격적인 제 3차 고려거란전쟁 발발
1-6.배수진을 친 천년의 전쟁 강감찬 귀주대첩
1-7.김종현의 기병대와 남풍의 등장
1-8.고려군의 포위 및 추격 섬멸
2. 고려사,요사에 기록된 고려거란전쟁
2-1.고려거란전쟁 양국의 전후 처리
2-3.드라마 고려거란전쟁 최수종과는 다른 강감찬 외모
2-4.강감찬 총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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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감찬의 제 3차 고려거란전쟁 직위
고려 서북면 행영 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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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수(上元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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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 강감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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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元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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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군(大將軍) 강민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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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관(判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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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사인(內史舍人) 박종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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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부낭중(兵部郞中) 유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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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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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마판관(兵馬判官)김종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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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랑(侍郞)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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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하 장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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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만 83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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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강감찬은 누구인가
젊은 시절의 이름은 강은천(姜殷川)이으로 우리가 현재 알고있는 강감찬이란 이름은 과거 급제 이후에 개명한 이름입니다.속자치통감에는 강감보(姜邯寶)로 기록되었습니다. 그의 선조는 고구려 말기의 장군 강이식으로 진주 강씨이며 아버지는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일조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강궁진(姜弓珍)이었습니다. 강궁진이 고려 개국 당시에 경주 지역에서 금천으로 이주했고 거기서 강감찬을 보았는데 여러 설화에서 강감찬의 어머니가 여우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기도 합니다. 강감찬의 아버지 강궁진이 태몽을 꾸고, 훌륭한 아들을 낳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을 때, 귀가 중 여인으로 둔갑한 여우를 만나 관계를 맺어 강감찬을 낳았다고 하는데 여우는 변신을 하고 인간을 홀리는 등의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본처가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또한 태어날 때 문곡성(文曲星)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설화가 있는 걸로 유명한데, 문곡성은 북두칠성의 4번째 별로 문(文)과 재물을 관장하는 별입니다. 그래서 강감찬이 태어난 생가의 이름이 낙성대입니다.
1-2.당나라 명장 곽자의와 강감찬의 닮은점
고려사 열전에 의하면 젊은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기발한 지략이 많았다고 하며, 983년(성종 2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는데 이 때 나이가 36세로 제법 늦게 관직 생활을 시작한 편이었습니다.그런데 983년 이후 1009년(목종 말년)에 예부시랑이 될 때까지 고려사에 등장하지 않는데 그 후 강조의 정변으로 젊은 현종이 즉위하고 나서는 출세길이 트였는데, 1010년(현종 1년) 요나라의 성종이 40만 대군으로 침공하는 제2차 여요전쟁이 발발하자 대세 의견인 항복을 반대하고, 홀로 몽진을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습니다.
오늘의 일은 그 죄가 강조에게 있으니 근심할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군세가 중과부적이니 그 예봉을 피했다가 서서히 이길 방도를 찾아야 합니다.
/고려사-강감찬 열전 中.
주전론을 외치던 문관과 무관들, 심지어 항전을 주장해 온 강감찬의 기록도 현종의 몽진 시기에는 사라지는데 도망갔던 신하들이 모두 처벌되었는데 강감찬은 따로 처벌받은 기록이 없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그냥 현종의 명을 받아 다른 임무를 띠고 파견을 갔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러한 공을 인정 받아서 1011년(현종 2년)에 국자좨주가 되었다가 곧바로 한림학사승지와 좌산기상시를 겸하였습니다. 그리고 1012년(현종 3년)에는 동북면행영병마사로 파견되어 여진의 침입에 대비하기도 했는데 이 때 감찰어사 이인택이 탄핵을 했으나 되리어 이인택이 파직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만큼 현종의 신임을 두텁게 받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으며 1014년(현종 5년)에는 중추사가 되어서 사직단 수축을 주장하였고, 1016년(현종 7년)에는 이부상서로 자리를 옮겼으며 그러다 강감찬은 1018년(현종 9년) 5월에 서경유수와 내사시랑평장사를 겸하게 되었는데 그가 중앙 고관직을 받음과 동시에 서경유수를 겸했던 것을 보면 거란의 대규모 침입에 대해 확실하게 대비하기 위한 인물로 낙점이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10월 서북면행영도통사가 되어 사실상 군사의 전권을 받게 됩니다. 그해 12월 거란의 소배압이 군대를 이끌고 고려를 침입하는 제3차 여요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상원수가 되어서 고려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대거란 방어 작전을 진두지휘했는데 이때 고려군 사령부의 무관들은 성공적인 기선 제압, 거란군의 전격전을 대비한 청야전술과 유격 전술, 귀주 대첩에서 보여준 망치와 모루 전술까지 철저한 작전 계획을 세우고 완벽하게 실행함으로써 재침입을 해 온 거란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강감찬은 당나라 최고의 명장 곽자의와 비슷한 점이 많은데 60세가 다 되어서야 두각을 나타낸 점, 국난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점, 80세가 넘도록 장수하며 신하로서 누릴 수 있는 극치에 이르렀다는 점 등이 매우 유사합니다.다만 고려사에 없는 26년 동안의 공백을 메꿀만한 기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닌데 용재총화,동국여지승람,해동이적 등의 조선시대 야사집에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주로 여러 지방 관직을 전전하는데 여기서 나타나는 강감찬은 그야말로 백성들의 고통을 해소하는 거의 만능 해결사에 기지가 넘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1-3.고려거란전쟁 승리 이후
거란과의 전쟁이 끝난 1019년(현종 10년) 4월 강감찬은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고자 하였으나 물러나지 못하고 궤장을 하사받았으며 그리고 11월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 천수현 개국남으로 임명됩니다. 그리고 12월에 공신호를 받게 되고 그러다 1020년(현종 11년) 6월에 치사하게 됩니다. 그렇게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인 1021년(현종 12년) 수도 개경의 흥국사에 석탑을 세웠는데 아래와 같은 글귀를 새겼습니다.
보살계제자 평장사 강감찬은 삼가 받들어
우리나라가 영원히 태평하며 먼 곳과 가까운 곳이 항상 평안토록 하기 위해
공손히 이 탑을 조성하여 영원토록 공양하고자 한다.
천희(天禧)[18] 5년 5월.
이후에는 조정에서 물러나 기록이 없다가 1030년(현종 21년) 개경 주변에 나성을 쌓는 논의가 나올 때 강감찬이 일전에 논의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나오고 곧바로 문하시중으로 승진하였다고 나옵니다. 아무래도 이 때 문하시중이 된 것은 치사 이후 조정 문헌에는 기록이 없다는 점과 당시 80이 훌쩍 넘은 나이를 생각해본다면 실제 문하시중 직책을 수행했다기보다는 강감찬에게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준 것으로 보이며 그리고 1031년(현종 22년) 8월에 사망하게 됩니다. 이 때 그의 나이 84세였으며 현종이 죽은 지 3개월이 지난 후의 일이었습니다. 저서로는 낙도교거집, 구선집 등이 있지만 아쉽게도 현재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1-4.제 3차 고려거란전쟁의 대회전
그렇다면 강감찬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물리친 귀주대첩은 어떠한 전투였을까 살펴보도록 하겟습니다.약 25년에 걸쳐 이어진 고려거란 여요전쟁의 대단원의 막을 내린 전투가 바로 귀주대첩으로 고구려 살수대첩과 조선 하산도 대첩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대첩이기도 합니다.고려거란전쟁의 배경을 살펴보면 1011년, 제2차 여요전쟁 당시 고려 현종은 몽진의 시간을 벌고자 요 성종에게 거란까지 찾아가 친조하겠다고 약속했다. 1012년, 고려 현종이 친조의 약속을 지키지 않자, 요 성종은 강동 6주를 대신 내놓으라고 요구했습니다. 1013~1017년, 거란이 7차례나 국지전을 벌이고, 동여진 해적들이 노략질해 고려의 피해가 수만명에 달했으며 1018년 12월 초, 거란이 소배압(蕭排押)을 도통으로 10만의 대군으로 본격적인 침공을 시작했습니다.
1-5.본격적인 제 3차 고려거란전쟁 발발
1018년 12월 10일, 대장군 강민첨이 12,000명의 기병으로 삼교천(三橋川, 흥화진 앞)에서 거란군을 크게 패배시킨 삼교천 전투가 벌어졌고 1018년 12월 중, 대장군 강민첨이 자주(慈州, 순천시)의 내구산(來口山)에서 거란군을 크게 패배시켰습니다.이때가지의 전투 양상은 재빠른 기병 위주의 고려군이 게릴라 전술로 거란군을 패배시켰다고 보고있습니다.
1018년 12월 중, 시랑 조원이 마탄(馬灘, 승호군)에서 거란군 1만을 죽이거나 사로잡았으며 1018년 12월 23일, 개경을 지킨 고려 현종이 태조의 관(재궁)을 부아산(負兒山, 황해북도 린산군) 향림사(香林寺)로 옮겨 안치했습니다.1018년 12월 26일, 고려 현종이 개경에 계엄령을 내리고, 주변 일대에 청야 전술을 펼칩니다.1019년 1월 2일, 서북면 강감찬 본대에선 김종현이 정예기병 1만을 이끌고, 동북면에선 병사 3300이 개경으로 남하를 시작했습니다.1019년 1월 3일, 거란군이 신은현(新恩縣, 신계군) 평야에 이르러 진을 펼칩니다.
1019년 1월 4일, 거란군이 야율호덕(耶律好德)을 보내 거짓으로 철군하겠다고 알리며 300기의 군사를 금교역(金郊驛, 금천군)의 협곡에 숨겨, 개경의 경계가 완화될 경우 성에 잠입하고자 했지만 고려 현종은 이에 속지 않고 야간에 100여명의 정예병을 보내 이들을 역으로 기습하여 전멸시켰습니다.이에 소배압은 신속히 철수를 결정하기에 이릅니다.1019년 1월 23일, 거란군이 청천강을 건너며 남쪽의 연주(漣州, 개천군), 북쪽의 위주(渭州, 영변군)에서 원수 강민첨 대장군(大將軍) 기병대에 유격당하여 500여급이 죽었는데 이처럼 해안길 방면을 강감찬이 틀어막았기에 소배압은 내륙길을 택했고, 강감찬은 내륙길의 마지막 관문인 귀주성(龜州, 평안북도 구성시) 앞 평원에서 거란군을 막아섰습니다.
1-6.배수진을 친 천년의 전쟁 강감찬 귀주대첩
1019년 2월 1일, 두 하천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군대가 마주보게 되었는데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 본대가 귀주성을 내려보는 하천 건너편 구릉에 진지를 쳤으며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 본대도 귀주성을 내려보는 하천 건너편 구릉에 진지를 쳤습니다.1월 2일 남하했던 김종현이 이끄는 고려군 정예기병대 1만이 남쪽에서 아직 귀주 평원까지 오지 않은 상태였습니다.다수의 거란 장수들은 구릉을 지키며 고려군이 두 하천을 건너 구릉지대로 오게끔 유도하자고 주장했는데 도감 야율팔가 혼자서 이를 반대하며 하천을 하나 건너 싸울 것을 제안했고, 소배압이 이 의견을 따랐습니다.양측 모두 구릉을 내려와 하천을 하나씩 건너, 귀주성 앞 동쪽 평원에서 둘 다 배수진을 치고, 대회전(會戰)을 하게 되었습니다.
(거란) 군사들이 다하(茶河), 타하(陀河) 두 강을 건널 즈음에 추격하는 고려의 군사들이 쫓아왔다. 여러 장수들이 모두 고려의 군사들로 하여금 두 강물을 건너게 한 다음 공격하려고 했다. 그런데 야율팔가 혼자서만 안 된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적들이 만약 두 강물을 건너게 되면 반드시 결사적으로 싸울 것인 바, 이는 위태로운 방법입니다. 그러니 두 강물 사이에서 치는 것만 못합니다.”
라고 했다. 그러자 소배압이 그 의견에 따라 두 강물 사이에서 싸웠다.
요사, 권 80 3.2.
1-7.김종현의 기병대와 남풍의 등장
양측은 승패가 나지 않으며 전투가 장시간 이어졌는데 1월 2일 남하했던 김종현의 기병대가 돌아오면서 팽팽하던 전투의 양상이 기병대가 나타난 순간 바람도 북풍에서 남풍으로 바뀌며, 소나기가 찾아오는등 고려군이 기세를 타고 분발하여 몰아붙이자, 거란군은 하천 쪽으로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거란(契丹)의 병사들이 구주(龜州)를 지나가자 강감찬(姜邯贊) 등이 동쪽 교외에서 마주하여 싸웠으나 양쪽 진영이 서로 대치하며 승패가 나지 않았다.
(승패가 나지 않는 이 때,) 김종현(金宗鉉)이 병사들을 이끌고 도달하였는데,
홀연히 비바람이 남쪽으로부터 불어와 깃발들이 북쪽을 향해 휘날렸다.
아군(고려군)이 그 기세를 타고 분발하여 공격하니, 용맹한 기운이 배가 되었다.
고려사절요》 권3
1-8.고려군의 포위 및 추격 섬멸
거란의 황제 직속 최정예인 천운군, 우피실군 중 빠져 죽은 자가 많았는데 석천(하천)을 등진 배수진이라 진영을 다시 재전열하지 못해 기병대가 허망하게 무너진 것으로 추정되며 겨울이라 말라서 쉽게 건너왔던 때와 달리, 돌아갈 땐 소나기로 인해 수위가 '빠져 죽을만큼' 불어나서 피해가 커진 것으로 추정됩니다.거란의 지휘관급 중 아과달, 작고, 고청명(직함에서 보듯 발해인 출신 부대 대장으로 발해인이 그래도 고려에 동족 의식을 느끼고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만감이 교차하는 부분입니다. 심지어 고려군에도 발해 유민 출신의 병사들이 대도수 장군을 비롯해 적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망국의 비애를 보여주는데 고청명이 전사한 후, 그의 가족들은 거란의 국가유공자로 보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해리 등이 죽었고 거란군은 석천 너머의 반령(벌판)에서도 큰 피해를 입었는데 하천 북동쪽은 구릉이 벌판을 밥그릇처럼(반령) 감싼 형태라, 역시 전열을 갖추기 어려운 포위섬멸의 연장이 되었을 것이 추정됩니다.거란군은 소배압조차 갑옷, 투구, 병장기, 말을 모두 버리며 도망치려 했으며 원수 강민첨 대장군이 북을 치며(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의 대장선처럼, 지휘부가 북을 치며 전진하는 것은 '아군이 북을 치며 전진할 수 있을만큼 충분히 압도적이니 아군은 힘내고, 적군은 포기하라'는 심리전이기도 합니다) 힘써 돌격하여 1만 이상을 포로로 잡거나 죽였습니다.병마판관 김종현이 명을 받고 기병대를 이끌고 남하했다 돌아오긴 했으나, 애초에 기병대는 강민첨 대장군의 휘하였으며 1017년부터 태복경(太僕卿)으로서 기병대를 직접 만들었고, 삼교천 전투에서 기병대를 직접 운영하기도 했습니다.전투가 끝나자 시체가 들을 채우고, 노획물은 길거리를 가득 메웠으며, 살아 돌아간 거란군은 수천에 불과했습니다.
2. 고려사,요사에 기록된 고려거란전쟁
이 달에 소배압(蕭排押) 등이 다하(茶河)와 타하(陀河)에서 고려와 전투했는데, 요의 군대가 불리했다.
천운군(天雲軍)과 우피실군(右皮室軍)에서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많았으며, 요련장상온(遙輦帳詳穩) 아과달(阿果達), 객성사(客省使) 작고(酌古), 발해상온(渤海詳穩) 고청명(高淸明), 천운군상온(天雲軍詳穩) 해리(海里) 등이 모두 죽었다.
요사 권 115 열전45
다하와 타하를 건널 적에 적(고려군)이 협공해서 활을 쏘자, 소배압이 갑옷과 병장을 버리고 달려왔던 바 이로 인하여 파면되었다.
요사 권 88 열전 18 <소배압고>
소배압 등이 고려와 다하(茶河)ㆍ타하(陀河)에서 전투했으나 크게 패배했다.
송사 요열전
거란군이 북쪽으로 달아나자 아군이 그 뒤를 쫓아가서 공격하였는데, 석천(石川)을 건너 반령(盤嶺)에 이르기까지 쓰러진 시체가 들을 가득 채우고, 노획한 포로·말·낙타·갑옷·투구·병장기는 이루 다 셀 수가 없었으며, 살아서 돌아간 적군은 겨우 수천 인에 불과하였다. 거란의 병사들이 패배한 것이 이때처럼 심한 적이 없었다.
고려사절요 권3
강민첨(姜民瞻)이 원수(元帥)가 되어 북을 치며 힘써 돌격하여 반령(盤嶺)의 들판에서 크게 패배시켰으니, 거란군이 퇴각하면서 창과 갑옷을 내버려 길거리를 가득 메웠다. 강민첨은 이에 10,000명을 포로로 잡거나 참수하였다.
고려사절요 권4
2-1.고려거란전쟁 양국의 전후 처리
고려거란전쟁 승리이후 고려 현종은 기뻐서 임시 누각을 짓고 승전군을 맞이하며, 강감찬의 손을 잡고 황금꽃을 주고, 9000여명을 포상했으며 요 성종은 분노하여 소배압의 얼굴 가죽을 뜯어내고 죽이겠다고 했으나 파직에 그쳤고, 공이 있는 장수들을 포상했다고 합니다. 고려 현종은 요 성종에게 예전처럼 '번국(藩國)'을 칭하고 공물을 바치게 해줄 것을 요청하며, 억류했던 야율행평을 돌려보냈습니다. 즉, 조공-책봉관계의 복구를 '요청'하였는데 고려의 요청을 받은 요 성종은 이를 '허락'했는데 이는 양국이 대등한 관계로 변하거나 혹은 입장이 뒤바뀌지는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한편으로는 전쟁의 원인으로 삼던 '고려 왕의 친조', '강동 6주 반환' 같은 무리한 요구들을 다시 강요하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고려 주변국들이 고려와의 교류가 증가했는데 동여진, 서여진, 불내국, 흑수말갈, 철리말갈, 송나라 등이 사신단과 토산물을 보내왔습니다.혹 귀주대첩이 고구려의 살수대첩처럼 수공으로 인한 승리라고 알려져 있으나 귀주대첩은 고려군과 거란군이 평원에서 맞붙은 한국사 최대의 평원 전투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귀주는 개경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곳으로 200여 년 후 몽골군이 쳐들어온 여몽전쟁의 초기인 1231~1232년에 귀주성 전투가 벌어졌기도 합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 왕의 귀환의 펠렌노르 평원의 전투 및 왕좌의 게임 서자들의 전투가 귀주 대첩과 비슷한 전개로 펼쳐지기도 합니다. 아군이 정황상 불리한 와중에 아군 보병과 적 보병이 몇 시간이나 접전을 벌이며 모두가 지쳐갈 때쯤 예상치 못한 기마군단이 돌격하며 전황을 바꾸고 승리했기 때문입니다.
2-2.귀주대첩을 이끈 강감찬에 대한 평가
하늘이 이 백성을 사랑함이여.
국가에 장차 화란이나 패망이 올 때에는 반드시 세상에 이름난 현인을 낳아
국가의 화란이나 패망을 위하여 대비하는 것이다.
기유(1009)년, 경술(1010)년에 역신이 난을 꾸미고 강한 적국이 와서 침략하여
내부의 분쟁과 외적의 화란으로 국운이 위급하게 되었으니 이때에 강공(姜公)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렸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공이 조정에 들어와서는 국가의 모의에 참여하고 밖에 나가서는 정벌을 맡아,
화란을 평정하며 삼한을 회복하여 종사와 생민이 길이 힘입게 되었으니,
하늘이 낳아서 이 백성의 화란과 패망을 대비한 이가 아니라면 그 누가 능히 이에 참여하리오.
아아, 성대하도다.
고려사절요 현종 22년, 강감찬 졸기의 사관 논평.
강감찬의 경우 문곡성 강림 설화가 있는 걸로 잘 알려져 있는데 훗날 강감찬이 재상이 되었을 때, 북송의 사신이 강감찬을 보고, "문곡성이 보이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는데 여기서 뵙습니다." 라며 인사를 올렸다는 일화인데 두 세대 후에 북송 인종때 명판관으로 이름을 날린 포청천도 이 '별의 화신'이었다는 설화가 있습니다. 다만 항간에 강감찬이 포청천의 환생이라는 말은 옳지 않은데 오히려 포청천이 강감찬의 손자뻘 나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조선의 퇴계 이황에게도 이 별의 화신이 내려와서 촉나라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또한 강감찬이 태어난 곳이 낙성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낙성대는 고려의 수도 개경에도 있었습니다. 즉, 개경에 있었던 강감찬의 저택을 일컬어 민간에서 '낙성대'라 불렀다고 하며, 이곳은 서울과 반대로 강감찬이 사망할 때 별이 떨어진 곳이었다고 합니다.
2-3.드라마 고려거란전쟁 최수종과는 다른 강감찬 외모
고려사에는 강감찬에 대해, 키도 작고 풍채도 볼품없어 평소에는 사람들이 그를 특별히 여기지 않았지만, 나라의 중대사를 의논할 때에는 정색하고 임해서 나라의 주춧돌이 되니 감히 범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으며 거란의 침입을 격파한 이후 나라에 계속해서 풍년이 들었는데 백성들이 "이게 다 강감찬 공 덕분이다." 라며 칭송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작지만 큰 인물이었다는 소리이며 문곡성의 화신처럼 여겨진 인물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거성일 것입니다. 성품도 청렴하고 검약해서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았으며 옷이 더럽고 해져도 계속 입었다고 합니다. 이런 걸 보면 청백리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인물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한국의 곽자의라는 평가를 받는데 고려시대 당시 60에 가까운 나이까지 장원 급제 이후 고려사에 등장이 없는데 이는 환갑이면 이미 살만큼 살았다는 당시 수명 기준으로 굉장히 늦은 등장인데 이후 현종의 즉위와 함께 출세길이 열리고,3차에 걸친 여요전쟁에서 공을 세운 후 말년에도 문하시중의 직위와 후작위를 받으며 개성에 나성 건축을 주도하는 등 활약했습니다. 이미 생전에 문하시중이라는 최고위 관직, 후작이라는 사실상 왕족과 개국공신을 제외하면 받을 수 있는 최고위 작위, 권력, 인망 등 모든 것을 누렸지만 일반적인 권신들과 다르게 숙청되지 않고 평안한 말년까지 보냈으며 사후에도 구국의 영웅으로 배향을 받고, 고려 이후에도 강감찬의 평가는 낮아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강감찬이 승리로 매듭지은 귀주 대첩 이후 금나라의 건국 때까지 북송, 요나라와 더불어 고려는 동북아시아의 한 축으로서 120여 년 동안의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그 업적은 높이 평가될 수 있습니다.
2-4.강감찬 총정리
강감찬은 문관 출신으로 정식 무관직을 제수받은 적이 없습니다. 84년 간의 긴 일생 동안 갑주를 입은 건 제3차 여요전쟁 때의 3개월 남짓이었지만, 귀주 대첩의 의의가 엄청나다보니 항상 장군처럼 묘사되고는 합니다.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관악구(당시는 고려 금주) 출신 인물이라 관악구에는 강감찬 장군의 시호를 딴 인헌초등학교·인헌중학교·인헌고등학교, 초명을 딴 은천초등학교가 있으며 2008년 관악구가 행정동 명칭을 변경하면서 강감찬 장군의 시호·초명·출생지를 딴 인헌동·은천동·낙성대동을 설치했습니다.또한 낙성대공원의 기마상, 강감찬 동상은 용산 전쟁기념관, 낙성대공원 등에 있으며 한때 경기도 수원시 팔달산에도 강감찬 동상이 있었으나 2007년에 이전되었습니다. 강감찬과 아무 연고도 없는 수원에 강감찬의 동상이 들어선 사연은 1971년 박정희 집권 당시 대통령이 "각 시군에 위인의 동상을 건립하라"는 일방적인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며 팔달산의 동상이 이전된 뒤 그 자리에는 일제강점기 때 파괴된 성신사가 복원되었습니다. 강감찬은 재상까지 지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배우자와 아들에 대한 기록이 없는데 배우자는 성씨조차도 남아 있지 않고, 아들로는 강행경(姜行經)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열전에 적혀 있지만, 이 사람에 대한 기록은 이름만 언급된 수준입니다.강감찬은 살수대첩의 을지문덕과 더불어 한민족이 이민족의 침략을 가장 탁월하고 압도적으로 이긴 대첩임에도 불구하고 그 정보가 많지 않지만 한민족이 이민족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천년의 승리를 거둔 승리였다는 점에서 당시 뿐 아니라 후세에서도 분명 찬양하고 길이 기억될 전쟁 승리이자 인물이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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