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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한국사의 미스테리/고려의 역사

993년 전쟁의 서막 고려거란전쟁_오직 외교술로 국난을 막은 천재외교가 서희

by 캐쉰 2024. 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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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1010년 거란이 침입을 맞고 현종이 몽진을 떠나는등 국난을 맞이하지만 양규 장군의 활약으로 거란군을 무찌릅니다.이후 1018년 다시 침략한 거란군을 강감찬이 귀주에서 몰살하다시피 격퇴하며 25년간에 걸친 고려거란전쟁에 종지부를 끊습니다.하지만 거란의 2차 침입에 구국의 영웅으로 활약한 양규 장군도,3차 침입때 거란군을 섬멸한 강감찬 장군의 귀주 대첩도 993년 침입한 서희의 천재적인 외교술이 없었다면 고려는 국난을 대비할 여유도 없이 조선의 임진왜란처럼 힘없이 거란군에 의해 국토가 초토화되었을 것입니다.오늘은  전쟁의 서막을 알렸던 고려거란전쟁 속 서희에 대해서 상세하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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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서희,말로 전쟁을 막다

1-1.침략군 거란의 의중을 꽤뚫어보다

1-2.강직한 신하 서희

1-3.거란과의 담판

1-4.거란군을 철군시키고 고구려 옛땅을 수복하다

1-5.서희의 외교적 담판이 가진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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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서희,말로 전쟁을 막다

993년 전쟁의 서막 고려거란전쟁_오직 외교술로 국란을 막은 천재외교가 서희

 

서희(徐熙, 942년~998년 음력 7월 14일[1])는 고려의 문신으로 960년(광종 11) 과거에 급제한 후 원외랑을 거쳐 병관어사로 재직 중, 993년(고려 성종 12년) 거란의 침입 때 거란 측 장수인 소손녕(蕭遜寧)과 담판을 하여 교전을 치르지 않고 퇴각시켰습니다.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郎平章事)를 거쳐 태보(太保)·내사령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장위(章威)입니다. 1027년(현종 18)에 성종 묘정에 배향되었습니다.

 

1-1.침략군 거란의 의중을 꽤뚫어보다

 

서희의 외가 어르신 중 용이 구름에 걸려 추락하다 바다의 신의 도움을 받아 용궁으로 간 태몽을 꾼 사람이 있는데 서희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지리에 밝았고 무예에 능했다고 합니다. 960년에 갑과로 과거에 급제한 뒤, 광평원외랑·내의시랑 등을 거쳐 983년 병관어사가 되었으며 993년 요 성종은 장수 소손녕과 80만 대군을 보내 고려를 공격하였는데 이에 고려 성종은 박양유, 서희, 최량 등을 보내어 싸우게 하였으나 패배하여 봉산군(오늘날 청천강 이북 지역)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다시 고려 성종은 이몽전을 청화사로 보내 화의를 표명하였으나, 적장 소손녕은 항복만을 요구하였는데 이몽전이 침략의 이유를 묻자 “너희 나라가 백성을 돌보지 않으므로 천벌을 주러 온 것이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이몽전이 돌아와 보고하니 고려 조정은 혼란에 빠졌고, 어떤 신하는 투항을 주장했고, 다른 신하는 땅을 떼어주자는 할지론을 주장했는데 이때 서희가 나서서 투항론과 할지론이 모두 옳지 않음을 주장했습니다. 그때 서희는 요나라의 침공 이유가 소손녕이 밝힌 바와는 달리 고려와의 강화에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민관(民官) 이지백도 서희에게 동조하였고 서희는 소손녕을 찾아가서 담판을 짓고 북쪽 땅을 얻어내기에 이릅니다.

 

1-2.강직한 신하 서희

 

성종이 서경에 행차하였을 때 미행으로 영명사에 가서 놀이를 하려 하자 놀이의 잘못됨을 상소, 간언하여 중지시켰고 또 어가를 따라 해주에 갔을 때 임금이 그가 주둔하던 막사에 들어가고자 하니, “지존께서 임어하실 곳이 못 됩니다.”라고 거절하였으며, 성종이 그에게 술을 올리라고 명하자 “신의 술은 감히 드릴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여 결국 막사 밖에서 어주를 올렸다고 합니다. 또한 공빈령 정우현이 봉사를 올려 ‘시정의 일곱가지 일’을 논한 것이 임금의 비위를 상하게 하자, 성종은 그를 내치려 하였으나 서희는 오히려 정우현의 논사가 심히 적절한 것이라고 변호하고 그 허물을 스스로에게 돌렸습니다. 그리하여 정우현은 감찰어사가 되고 서희는 말과 주과를 위로의 증표로 받았다고 합니다. 996년에 병으로 사찰 개국사에 요양하게 되자 성종이 직접 왕림하여 어의 한벌과 말 세필을 각 사원에 나누어 시납하고, 개국사에 다시 곡식 1,000석을 시주하는 등 그가 완쾌되도록 쾌유를 기원하기도 했으며 998년 57세를 일기로 서희가 죽음을 맞자 부음을 들은 왕이 크게 슬퍼하며 베 1천 필, 보리 3백 석, 쌀 5백 석, 뇌원다 2백 각, 대다 10근, 전향 3백 량을 부의로 주었습니다. 시호는 장위이며 1027년에 성종 묘정에 배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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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거란과의 담판

 

993년(성종 12년) 거란이 고려를 쳐들어왔는데 처음 소손녕은 "80만 대군이 왔다.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모두 죽일 것이다"라고 하며 고려의 항복을 종용하였고 이와 함께 소손녕은 압록강을 건너 봉산군에서 고려군과 첫 교전을 치러 고려군 선봉장을 붙잡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소식이 함께 전해지자, 고려 조정은 큰 충격에 빠져 할지론으로 전쟁을 막자는 주장이 크게 일었고, 고려 성종도 서경의 쌀을 버리도록 칙명을 내렸는데 그러자 서희는

 

전쟁의 승패는 군사의 강약에 있는 것이 아니라
틈을 잘 엿보아 움직이는데 있을 뿐입니다.
먹을 것이 넉넉하면 성도 지킬 수 있고 싸움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갑자기 쌀을 버리려 하십니까?
이번에 서경이북의 땅을 내주더라도
삼각산 이북은 모두 고구려의 옛 강토인데,
앞으로 저들이 한없는 욕심으로 끝없이 강요한다면 다 내주시겠습니까?

 

라며 쌀을 버리라는 것과 할지론을 모두 비판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들은 실은 우리에게 공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적의 숫자만 보고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 줘서는 안 될 것입니다.

 

라며 거란의 80만 대군은 한낱 부풀려진 허풍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서희가 소손녕과 담판을 짓기 위해 그가 머무는 봉산군 장막으로 가자, 거란군은 "먼저 대국의 귀인에게 절을 올리는 예를 갖추어라!"라며 위협적으로 서희를 압박하였고 "뭘 꾸물거리고 있는가? 어서 절을 올려라!"라고 하자, 서희는 크게 노하면서 "무슨 말인가? 신하가 임금을 대할 때 뜰에서 절하는 것은 예법에 있는 일이나, 양국의 대신이 대면하는 좌석에서 절을 하는 예는 없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 숙소로 돌아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소손녕이 내심 서희의 인품을 비범하게 여기며, 결국 뜰에서 서로 마주 절을 한 뒤에 동서로 마주 앉았습니다. 결국 소손녕이 서희를 압박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비상식적인 예를 고집했으나 오히려 서희가 기선을 먼저 제압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1-4.거란군을 철군시키고 고구려 옛땅을 수복하다

993년 전쟁의 서막 고려거란전쟁_오직 외교술로 국란을 막은 천재외교가 서희

 

 

서서히 협상이 진행되자 소손녕은

 

너희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의 옛 땅은 우리 거란의 것이다.

 

라고 하며 침략명분을 밝히자, 서희는

 

그렇지 않소. 우리 고려는 바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요.
그래서 나라이름을 고려라고 부르고 서경을 국도로 정한 것이오.
땅의 경계를 가지고 말하자면
오히려 귀국의 동경이 우리 영토 안에 들어와야 하거늘
어찌 우리가 침범했다는 말을 하시오?

 

라고하자 소손녕은 다음으로

 

고려는 거란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도 어째서 바다건너 송나라와만 교류하고 있는가?

 

라고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즉, 거란은 거란과 송의 전면전이 발생시 배후에 있는 고려의 침입이 두려워 먼저 고려가 송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실질적인 거란의 침략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소손녕의 말을 통해 이와 같은 거란의 속마음을 간파한 서희는

 

고려와 거란 양국의 국교가 통하지 못하는 것은 여진이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라며 여진이란 핑계거리를 만들어낸다음

 

만일 우리가 여진을 쫓아내고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여
그곳에 성과 보를 쌓아 길을 통할 수만 있다면 어찌 귀국과 국교를 통하지 않겠소?

 

라 하며, 서희의 애초 목적은 거란군의 철수였으나 오히려 이 담판기회를 통해 고구려의 옛땅 회복이라는 난제를 해결하고자 하였고 결국 서희는 거란과의 협상에 성공하며, 서경 이북땅을 잃으며 항복하는 것이 아닌, 강동 6주의 땅을 가질 기회를 얻어냄과 동시에 소손녕은 서희에게 낙타 10두, 말 100필, 양 1,000마리와 비단 500필을 선물로 주고 떠났습니다.

 

1-5.서희의 외교적 담판이 가진 의미

 

고려거란전쟁은 서희, 양규, 김숙흥, 강감찬 등 여러 인물들이 활약한 전쟁이지만, 요나라의 주류 민족이었던 거란족은 오늘날 중국과 몽골에 흡수되어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고구려-수 전쟁, 고구려-당 전쟁이나 고려시대의 여몽전쟁, 조선시대의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다른 주요 전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묻히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원된 군인의 수만 봐도 상기된 전란들에 결코 뒤지지 않았던 대규모의 전란이었으며, 훗날 고려사 및 동아시아사의 1세기 이상의 전개에 큰 영향을 미친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망국 발해의 유민들은 요나라군으로 참전한 고청명, 고려군으로 참전한 대도수처럼 옛 발해인끼리 서로 싸우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맞기도 합니다. 이후 발해인들은 여·요 각국에 동화되어 사라지게 됩니다.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만주 일대에 남은 발해인의 정체성은 발해부흥운동을 통해 이후 건국되는 금나라때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지만, 원,명시대를 거치면서 소멸되었습니다.거대 유목 제국을 패퇴시킨 대규모의 전투임에도, 세계사적인 인지도는 거의 없는 수준이기도 합니다.

 

고려는 승전 이후에도 보주 문제로 요나라에게 소극적으로 굽히는 형국이 계속되었고, 거란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건재했기 때문입니다. 세계사적으로는 물론이고, 동아시아사에서도 이웃국가인 중국과 일본에서조차 별로 알려지지 않은 전쟁이 여요전쟁입니다.그러나 전근대 정주문명 국가에게 있어서 100,000명 단위의 유목민 침공은 거의 신의 채찍이나 다름 없는 대재앙이었고, 그걸 이토록 완벽하게 분쇄한 전투는 세계사를 찾아봐도 사례가 많지 않습니다. 한국사에서 상당히 중요한 전쟁인데, 발해가 멸망해 만주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된 후 중원 왕조의 도움 없이 한반도 국가와 유목제국이 붙은 첫 번째 대규모 전면전으로 2, 3차 전쟁은 말 그대로 고려의 국운을 건 총력전이었습니다. 때문에 이전까지 중앙집권체제가 완성되지 않아 각각 고구려·백제·신라·가야계 호족, 발해 유민 등 다양한 지방 호족들의 연합체처럼 엉성한 체제였던 초기 고려는 국가 존립의 위기 앞에서 하나로 단결하여 그야말로 과거 내전 전력은 묻지 않고 모두가 총동원되어 거란의 침공을 막아냈으며 이 과정에서 고려의 국왕 현종은 이전부터 행했던 삼국 능묘의 정비를 통한 정서적인 단결 유도는 물론, 전쟁에 참전한 모든 백성을 위해 전사자 가족 지원, 유해 발굴 사업 등을 시행해 한반도의 모든 주민들을 하나의 고려인으로 처음 단결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로 인해 전쟁 승리 이후 고려는 단일민족국가이자 안정적인 중앙집권국가로의 이행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는데 그 서막을 서희가 거란군을 천재적인 외교술로 돌려 새우고 강동 6주까지 획득하면서 고려거란전쟁 2,3차 전쟁 승리의 밑바탕을 제대로 깔아주었다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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