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전쟁에서 서희 장군이 획득한 강동 6주의 진짜 위치에 대한 고찰 ③편에서는 강동 6주의 대략적인 범위가 어디쯤인지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고려거란전쟁에서 서희 장군이 획득한 강동 6주의 진짜 위치에 대한 고찰 ④편에서는 구체적인 위치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할 것입니다.
목차
1.평안북도가 정말 귀주였을까
1-1.소배압은 왜 산악지대로 퇴각했나
1-2.고려사 지리지의 이상한 기록
1-3.원나라 심양로에 편입됐던 귀주
1-4.귀주대첩 기록에 나온 다하(茶河)와 타하(陀河)
1-5.귀주대첩이 일어난 장소는 요령성 심양시 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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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평안북도가 정말 귀주였을까
강동 6주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을 꼽자면 아마도 제3차 여요전쟁의 마지막 전투이자 고려의 빛나는 승리로 기록된 귀주대첩(龜州大捷)이 있었던 귀주(龜州)일 것입니다. 따라서 먼저 귀주대첩의 장소인 귀주의 위치부터 찾고 그 뒤를 이어 다른 5곳의 위치를 사서의 기록을 통해 찾아낼 수 있는 한 모두 찾아볼 수 있도록 해볼 것입니다. 기존엔 귀주대첩이 있었던 장소를 평안북도 구성시라고 설명했지만 이미 그 설명은 틀렸음을 앞선 포스팅에서 확인했습니다.
1-1.소배압은 왜 산악지대로 퇴각했나
위의 지도는 국사 교과서에 실린 여요전쟁 당시의 지도로 빨간색 화살표가 1018년 제3차 여요전쟁 당시 소배압(蕭排押)이 이끌었던 10만 대군의 진격로입니다. 언뜻 봐서는 문제점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바로 아래 지도는 구글 위성 지도를 통해 다시 표시한 지도입니다. 고려사에 적힌 기록대로 소배압의 진격로를 국사학계의 일반적인 지명 비정에 따라 구글 위성 지도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이상하게 소배압의 거란군은 산악지대를 타넘으며 퇴각하고 있는 것입니다.이렇게 지형이 표시된 지도를 보면 문제점을 바로 발견할 수 있는데 그 당시 전황(戰況)을 고려사와 요사에 적힌 기록을 통해 살펴보면 소배압은 변방 지역부터 잠식하며 쳐들어간 것이 아니라 바로 고려 수도 개경을 노리고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현종이 청야(淸野) 전술을 써서 굳게 버틴데다 북방엔 강감찬(姜邯贊)이 이끄는 20만 대군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병참선이 끊어져 소배압의 10만 대군은 아무 것도 못하고 고립되어 더 이상 전투를 수행할 수 없게 됐습니다. 그런 군대가 고려 땅에 오래 머물러서 좋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소배압이 이끈 거란군의 주력 부대는 당연히 기병이었는데 기병들은 산악지대에서 위력을 발휘하기 힘든데 쳐들어올 때 평지길을 이용해 신속하게 진군했다면 나갈 때도 평지길을 이용해 나가는 것이 상책이지만 소배압은 저렇게 평안도 동부의 험악한 산악지대를 거쳐 퇴각한 것일까?
거기다 국사 교과서에서 귀주라고 표시한 평안북도 구성시는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북쪽에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지형입니다. 만약 귀주가 구성시라면 고려가 귀주 북쪽의 산에다 복병을 해둘 경우 소배압 본인조차 생사를 장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귀주대첩의 기억이 진하게 남아 소배압이 마치 무능한 졸장인 것처럼 인식돼 있지만 실제 소배압은 문무겸비의 백전노장(百戰老將)이었습니다. 유독 한국에서만 귀주대첩 때문에 저평가를 받고 있을 뿐 실제 소배압은 거란 최고의 장수 중 한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런 사람이 저런 길을 퇴각로로 정했을 리 없는데 이 점에서 볼 때 귀주가 구성시라는 주장은 선뜻 믿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1-2.고려사 지리지의 이상한 기록
우선 고려사 지리지에는 귀주에 대해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살펴보면,고려사 권 58 지 12 지리 3 북계에 기록된 귀주의 기록은 이렇습니다.
본래 고려의 만년군(萬年郡)이다.
성종 13년(서기 994년)에 평장사 서희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여진을 공격해 쫓아내고 축성하여 귀주라 했다.
현종 9년(서기 1018년)에 방어사를 삼았다. 고종 3년(서기 1216년)에 거란의 병사가 쳐들어오자
주의 사람들이 싸움으로 막아내 참획한 자가 매우 많았다.
고종 18년(서기 1231년)에 이르러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병마사 박서(朴犀)가 힘을 다해 막아내고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으므로 그 공으로 정원대도호부로 승격시켰다.
후에 도호부라 했다가 또 정주목(定州牧)으로 고쳤다.
이 기록을 보면 뭔가 이상한 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앞서도 말했듯이 이 기록은 고려사에 적힌 기록인데 “본래 고려의 만년군이다”는 기록은 뭘로 봐도 어색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귀주란 곳은 분명히 994년에 서희가 여진을 내쫓고 축성한 곳이라고 했습니다. 즉, 994년 이전까지 귀주라는 곳은 여진의 영토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본래 고려의 만년군이다”는 기록은 뭔가 어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에도 평안도 의주목 정주목 편에 “본래 고려의 만년군(萬年郡)인데, 현종(顯宗) 9년 무오에 귀주방어사(龜州防禦使)를 두었다”고 하며 고려사 지리지와 같은 기록이 실려 있습니다. 즉, 고려사 지리지와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이 같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왜일까? 이런 이상한 기록이 남게된 이유는 지금 우리가 보는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가 비슷한 시기에 편찬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책은 서로 연관성을 주고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분명히 고려 왕조의 영토 지리를 기록하는데 “본래 고려의 〇〇군이다”는 이상한 기록이 첨가된 것입니다. 그리고 귀주의 기록을 보면 1231년 이후의 기록이 부실한데 그 이유는 왜일까? 이런 점을 볼 때 1231년 이전 귀주는 다른 곳에 있었는데 후에 평안북도 구성시였던 만년군에 옮겨 설치한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드는 대목입니다. 이렇게 기존의 행정구역을 다른 지역에 옮겨 설치한 것을 교치(僑治)라고 하는데 다시 말해 평안북도 구성시는 본래 귀주가 아니라 만년군이었고 몽골의 침략 이후부터 이곳에 귀주를 옮겨 설치하면서 귀주라고 불리게 됐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럼 실제 귀주의 위치가 어디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는데 고려사지리지에 적힌 귀주의 연혁을 보면 1231년 이후의 기록이 부실한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이유를 원사, 신원사 지리지를 통해 알아볼 수 있습니다.
1-3.원나라 심양로에 편입됐던 귀주
두 사서의 지리지에 적힌 기록을 살펴보면 1233년에 고려 역적 홍복원(洪福源)이 귀주를 포함한 서경도호 예하의 40여 성을 몽골에 갖다 바쳤는데 몽골은 그 지역을 심양로(瀋陽路)에 편입시켰다고 합니다. 심양에서 평안북도 구성시까지 거리를 구글 지도로 측정해 보면 직선거리로만 무려 256.6km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두 곳 사이에는 천산산맥, 강남산맥, 적유령산맥 등 산악지대들이 있어 그 당시 도로 체계를 고려하면 족히 1,000리는 넘는 먼 거리입니다. 귀주를 제외하고 홍복원이 몽골에 갖다 바친 40여 성이 구체적으로 어디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지금의 평안북도 지역을 심양로에 편입시켰다고 보는 것은 너무 무리한 주장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원사, 신원사 지리지에 적힌 심양로의 연혁을 살펴보면 심양로가 심양로 → 안무고려군민총관부 → 심주등로안무고려군민총관부로 명칭이 바뀌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분명히 몽골의 행정구역일진대 왜 유독 ‘고려’를 강조한 것일까? 심지어 고려 26대 국왕인 충선왕(忠宣王)은 고려 국왕과 심양왕(瀋陽王)을 겸직하기도 했습니다. 심양왕은 말 그대로 심양 지역을 다스리는 왕이란 뜻으로 충선왕 때부터 원나라가 망할 때까지 약 60년 동안 심양왕은 오직 고려 왕족들만 차지했습니다.
백과사전에서는 고려 국왕이 심양왕을 겸직하게 된 이유에 대해 “당시 선양(瀋陽)을 중심으로 한 랴오닝성(遼寧省)에는 고려의 전쟁포로,항속민(降屬民),유민(流民) 등의 집단이 많아 고려의 영토와 같은 특수지역”이기 때문이란 식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고려의 유민들이 어째서 심양까지 흘러들어간 것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주류 강단사학자들 말대로라면 심양 지역은 1232년 당시엔 금나라나 동진국(東眞國)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심양 지역엔 금나라나 동진국 유민들이 더 많았을 것 이기 때문입니다.숫자로 보면 고려인들보다 금나라 사람들이 더 많아야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귀주를 비롯한 40여 성이 원나라 심양로에 편입되었다면 심양 지역에 있었다는 고려인들은 압록강 이북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아니라 본래 그 땅에 살고 있던 고려인들이었던 건 아니었을까? 즉, 본래 고려의 영토가 심양 일대까지 뻗어 있었는데 그 땅을 역적 홍복원이 몽골에 갖다 바쳤다고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몽골이 그 지역에 본래 살고 있었던 고려인들을 위무하기 위해 심양로를 안무고려군민총관부, 심주등로안무고려군민총관부로 고쳤고 그마저도 신통치 않아 고려 국왕에게 심양왕을 겸직하도록 했다고 보는 게 더 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고려는 자국의 영토가 요양, 심양 지역까지 이어져 있었다는 걸 여러 차례 주장한 바 있고 고려사에 그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1-4.귀주대첩 기록에 나온 다하(茶河)와 타하(陀河)
고려사는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과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이 마지막으로 맞붙었던 장소를 귀주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요사는 귀주의 위치가 다하(茶河)와 타하(陀河)라는 두 강 사이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국사학계는 다하를 삼교천, 타하를 청천강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의 일방적 주장일 뿐 역사적 사실이 아닙니다. 요사 권 38 지 8 지리지 2를 보면 동경도(東京道) 귀덕주(貴德州)의 기록에 타하라는 강이 언급됩니다. 그 기록을 보면,
귀덕주 영원군(寧遠軍)은 하등주이며 절도사를 두었다. 본래 한나라 양평현이다.
한나라 공손도(孫度所)가 점거하였다. 태종 때에 찰할(察割)이 포로로 잡은 한족 백성들을 살게 하여 설치했다.
후에 반역죄로 주살되면서 몰수되었다. 성종이 귀덕군을 세우고 후에 이름을 고쳤다.
타하(陀河)가 있고 대보산(大寶山)이 있으며 숭덕궁(崇德宮)에 예속시켰고
군사 업무는 동경도부서사(東京都部署司)에 예속시켰다.
다하나 타하라는 강은 모두 요나라에서 부른 이름이지 우리나라에서 부른 이름이 아닙니다. 귀덕주에 있다는 타하와 귀주에 있는 타하가 과연 서로 다른 강이었을까? 마침 요사는 귀주(龜州)를 ‘貴州’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귀덕주의 위치를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나라가 귀덕주 영원군을 설치했다. 또 귀덕현을 설치해 주의 치소로 삼았다.
금나라가 폐지했으나 영원군은 존속시켰다. 원나라가 폐지했다. 옛 성은 오늘날 봉천성 철령현 동남쪽에 있다.
귀덕주는 요령성 철령시 동남쪽에 있다는 것으로 타하라는 강 또한 이 일대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청나라 때 편찬된 성경강역고(盛京疆域考) 권 4 요(遼) 편은 귀덕주의 위치를 오늘날 요령성 철령시라고 하면서도 주석으로 이런 의문을 덧붙였는데 그 기록을 한 번 살펴보면
성종(聖宗) 통화(统和) 28년(서기 1010년)에 친히 고려를 정벌했고
11월 압록강을 건너 그 병사들을 패배시키고 마침내 개경을 불지르며 청강(清江)에 이르렀다.
다음 해 군사를 물리고 돌아올 때 귀덕주에 이르러 비를 만나 비가 개기를 기다린 뒤 건넜다.
기축일에 압록강을 건넜다.
고 했는데 이 귀덕주는 마땅히 압록강 동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금사지리지의 귀덕주 연혁을 고찰해 보면 확실하게 철령, 승덕 2현의 경계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압록강 밖의 고려에도 또 귀덕주가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요사가 본래 오류가 많고 믿기엔 증거가 부족합니다. 금나라의 귀덕주를 참고해 보면 청나라 학자들이 이런 의문을 남긴 이유는 그들 또한 고려와 요나라 간 전쟁이 일어난 곳을 오늘날 압록강 일대로 보고 있었기 때문으로 그만큼 사람이 편견을 가지게 되면 진실을 보는 눈이 가려진다는 걸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입니다. 요사 본기와 이국외기 고려 조에는 철수하던 요나라 군대가 귀주(貴州) 남령곡(南嶺谷)이란 곳에서 큰 비를 만나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실제 귀주대첩이 있었던 장소는 사서의 기록을 검토했을 때 평안북도 구성시가 아니라 만주 요령성 철령시 철령현 일대로 판단됩니다.
1-5.귀주대첩이 일어난 장소는 요령성 심양시 인근
결국 요나라의 귀덕주와 고려의 귀주는 서로 같은 곳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앞서 귀주를 비롯한 서경도호 예하의 40여 성이 고려 역적 홍복원에 의해 심양로에 편입되었다고 했고 또 귀주의 위치가 다하와 타하 두 강 사이라고 했는데 귀덕주에 타하란 강이 있었습니다.앞서 압록강(鴨淥江)이 요하라고 했으니 기록에 나온 압록강을 요하로 보고 해석하면 전혀 해석에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고려사 권 94 열전 7 양규열전에는 1011년에 야율융서가 이끄는 거란군이 퇴각할 때 양규(楊規)와 김숙흥(金叔興)이 거란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강역고 권 5의 기록을 보면 금나라 귀덕주의 귀덕현에 범하(范河)라는 강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요나라 귀덕주의 타하가 금나라 귀덕주의 범하로 표기된 것입니다. 즉, 타하라는 강은 지금의 요령성 범하를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하라는 강은 범하의 북쪽에 있는 시하(柴河)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귀주는 그 두 강 사이에 위치해 있어야 하는데 범하와 시하 사이에 위치한 곳은 오늘날 요령성 철령(鐵嶺)시입니다.
앞서 귀덕주의 위치는 요령성 철령시 동남쪽에 있다고 했는데 현재의 철령시는 12,966km2에 달하는 광활한 면적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귀주대첩 당시 기록을 고려사 권 94 열전 7 강감찬전을 통해 살펴보면 당시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은 귀주 동쪽 교외에서 소배압의 거란군을 공격했으며 앞서 말했듯이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은 다하와 타하 즉, 시하와 범하 두 강 사이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투 중에 남풍이 갑자기 불어서 고려군이 더욱 힘을 내 거란군을 물리쳤다고 하는데 이로 보아 고려군이 남쪽에 거란군이 북쪽에 진을 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 볼 때 귀주대첩은 오늘날 요령시 철령시 은주(銀州)구 일대에서 일어났던 것으로 판단되며 귀주 역시 이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봐야할 것입니다. 고려사와 요사 두 사서의 기록을 참고해 볼 때 귀주성은 철령시 철령현 이천호향(李千戶鄕)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거란군은 그 동쪽을 지나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려군이 귀주성 동쪽 교외로 나아가 거란군을 추격했고 그 후 거란군은 범하와 시하 두 강 사이에 배수진을 쳤는데 아마 이곳은 지금의 철령시 은주구 용산향(龍山鄕) 일대로 판단됩니다. 이상으로 볼 때 고려의 귀주는 지금의 요령성 철령시 철령현이었음이 분명하며 귀주대첩 또한 평안북도 구성시가 아니라 사실은 요령성 철령시에서 일어났던 일인 것입니다. 이곳은 심양시 북동쪽에 위치해 있는데 1233년 고려 역적 홍복원이 몽골에 갖다 바친 귀주 일대 40여 성이 심양로에 편입될 수 있었던 사실도 자연스럽게 이해된다는 것입니다. 귀주의 위치가 요령성 철령시 일대임이 확인됐으니 서희가 개척한 강동 6주의 나머지 지역도 이 일대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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