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전쟁에서 서희 장군이 획득한 강동 6주의 진짜 위치에 대한 고찰 ②편에서 고려의 북계(北界)가 지금의 압록강이 아니라 요령성 요양시와 심양시 일대까지 뻗어 있었고 명나라가 설치하려 한 철령위 역시 심양시 부근에 있었음을 확인했습니다. 또한 고려시대 때 압록강이라 불린 강은 일명 맑은 압록강인 ‘鴨淥江’과 푸른 압록강인 ‘鴨綠江’ 2개가 있었던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그 2개의 압록강 중에서 고려 강동 6주와 관련이 있는 곳이자 국경이 되었던 압록강은 맑은 압록강인 ‘鴨淥江’이란 사실까지 확인했습니다.고려거란전쟁에서 서희 장군이 획득한 강동 6주의 진짜 위치에 대한 고찰 ③편에서는 그 맑은 압록강이 어떤 강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목차
1.동녕부와 쌍성총관부는 모두 만주 지역에 존재
1-1.맑은 압록강의 정체는 요하
1-2.거란족의 발상지 내몽골자치구의 시라무렌 강
1-3.고려와 금나라의 국경 신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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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동녕부와 쌍성총관부는 모두 만주 지역에 존재
강동 6주는 몽골의 침략 당시 홍복원(洪福源)과 최탄(崔坦) 등 고려 역적들에 의해 몽골 영토로 편입되고 맙니다. 국사 교과서는 몽골이 1270년에 서경 일대에 동녕부(東寧府)를 설치해 다스렸고 1258년에 화주(和州)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해 다스렸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 중 동녕부 지역은 1290년에 반환받았지만 쌍성총관부 지역은 반환받지 못했고 1356년에 공민왕(恭愍王) 때에야 무력으로 수복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32년이 지난 1388년에 명나라가 난데없이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통보하고 나섰습니다. 국사 교과서는 동녕부와 쌍성총관부가 모두 한반도 안에 있는 것으로 표시했지만 과연 그럴까? 다시 철령위 사건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동녕부와 쌍성총관부가 어디에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명사 조선열전에 따르면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철령위 설치를 통보하자 고려 우왕(禑王)이 표문을 올려
철령(鐵嶺)의 땅은 실상 대대로 고려가 지켜왔으니 옛날처럼 해주시길 바랍니다
고 항의했는데 정작 이에 대한 주원장의 답변이 이상한데 주원장은 고려 우왕의 표문을 받고선 이런 반응을 보였습니다.
고려가 옛날엔 압록강(鴨綠江)을 경계로 했으면서 이제 와서 철령(鐵嶺)이라고 꾸며서 말하니 거짓으로 속이는 것이 분명하다.
이러한 뜻을 짐의 말로 효유하여 본분을 지키게 함으로서 쓸데없는 상쟁의 원인을 낳지 말게 하라.
高麗舊以鴨綠江爲界今飾辭鐵嶺詐僞昭然其以朕言諭之俾安分毋生釁端
만약 여기서 언급된 철령이 강원도 회양군의 철령이라면 주원장은 정말 정신이상자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고려가 알아서 제 땅을 헌납하는데 왜 화를 낼까? 따라서 주원장이 말한 철령은 한반도에 있었던 철령이 아니란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주원장의 말 속에 나온 옛날은 바로 원나라 시절을 말하는 것으로 원나라 시절 영토 영유권을 내세워 철령위를 설치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로 볼 때 원 간섭기 시절 고려가 동녕부, 쌍성총관부 설치 등으로 영토를 잃었어도 국경선이 지금의 압록강까지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동녕부와 쌍성총관부 등은 모두 한반도가 아니라 압록강 이북의 만주 지역에 설치되었던 것입니다. 실제 철령위 기록을 보면 주원장이 “철령의 이동, 이서, 이북을 요동에 속하게 하라”고 한 기록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강동 6주 또한 한반도가 아니라 만주 지역에 있었고 강동 6주와 관련된 압록강(鴨淥江) 또한 만주 지역의 강임을 알 수 있습니다.
1-1.맑은 압록강의 정체는 요하
요사 권 1 본기 1 태조 상(上)을 보면 요 태조 야율아보기가
천복(天復) 9년(서기 909년) 겨울 10월 무신(戊申)일에 압록강(鴨淥江)에서 낚시를 했다.
天復九年冬十月戊申鉤魚於鴨淥江
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에 나온 압록강이 과연 지금의 압록강이었을까? 당시는 발해가 아직 버티고 있었고 요나라가 건국되기도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야율아보기가 어떻게 발해 영토 한복판에 있는 지금의 압록강에 가서 낚시를 하고 돌아올 수 있을까? 이 기록을 통해서도 압록강이 지금의 압록강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요사 권 36 지(志) 6 병위지(兵衛志) 하편에 적힌 기록을 보면 압록강(鴨淥江)의 정체가 좀 더 자세히 드러납니다.
동경(東京)은 압록(鴨淥)의 서북쪽 봉우리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삼는다.
황룡부(黃龍府)는 정병(正兵)이 5,000명이고 함주(咸州)는 정병이 1,000명이다.
동경과 여직(女直)의 경계는 압록강(鴨淥江)에 이른다.
東京至鴨淥西北峰為界黃龍府正兵五千咸州正兵一千東京沿女直界至鴨淥江軍堡凡七十各守軍二十人計正兵一千四百
동경이란 동경 요양부를 말하는데 위 기록에 나온 동경이란 곳은 지금의 요령성 요양시를 말하고 황룡부는 길림성 장춘시 농안현을 말하며 함주는 요령성 철령시 일대를 말합니다. 과연 위 기록에 나오는 압록강이 지금의 압록강을 말하는 것일까? 만약 위 기록에서 말하는 압록강이 한반도의 압록강이라면 동경이 압록강 서북쪽 봉우리~압록강을 경계로 삼고 있다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길림성 장춘의 황룡부와 요령성 철령의 함주가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이 말은 곧 요나라 동경과 관련된 압록강은 한반도의 압록강이 아니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고려와 요나라의 국경이 되었던 맑은 압록강 즉, 압록강(鴨淥江)은 동경 요양부 인근에 있는 강이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동경 요양부 인근에 있는 큰 강으로서 땅을 동서로 가르는 강은 요하 뿐입니다. 이로 볼 때 맑은 압록강의 정체는 요하일 가능성이 매우 높고 강동 6주 또한 지금의 평안북도 지역이 아니라 요하 동쪽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1-2.거란족의 발상지 내몽골자치구의 시라무렌 강
鴨淥江을 요하에 옮겨놓고 설명하면 많은 부분이 설명이 되는데 909년에 야율아보기가 鴨淥江에서 낚시를 했다고 했는데 요하 상류가 바로 거란족의 발상지인 내몽골자치구의 시라무렌 강입니다. 야율아보기가 낚시를 한 鴨淥江은 바로 요하 상류를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당서 동이열전과 원사 외국열전 등은 고구려 평양성이 鴨淥江 동남쪽에 있다고 했는데 요사 지리지는 바로 동경 요양부가 고구려 평양성이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양시는 요하 동남쪽에 있으니 기록과도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994년 서희가 소손녕과 담판을 했을 때 소손녕은 '고려는 신라의 옛 땅에서 일어난 나라'이고 요나라가 현재 고구려 옛 땅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니 요나라가 고구려의 계승자라는 식으로 발언을 했다. 이에 서희가 이렇게 반박했는데
우리나라가 바로 고구려의 옛 땅이니,
그 때문에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한 것이다.
국경 문제를 두고 말한다면,
요나라의 동경(東京)도 모조리 우리 땅에 있어야 하는데
어찌 우리가 침략해 차지했다고 하는가?
게다가 압록강(鴨綠江) 안팎도 우리 땅인데,
지금 여진(女眞)이 그 땅을 훔쳐 살면서
완악하고 교활하게 거짓말을 하면서 길을 막고 있으니
요나라로 가는 것은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다.
조빙이 통하지 않는 것은 여진 때문이니,
만약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영토를 돌려주어
성과 보루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해준다면
어찌 감히 조빙을 잘 하지 않겠는가?
장군이 만일 나의 말을 천자께 전달해 준다면
천자께서 애절하게 여겨 받아들이실 것이다.
여기서 곰곰이 생각해 봐야할 것이 "국경 문제를 두고 말한다면, 요나라의 동경(東京)도 모조리 우리 땅에 있어야 하는데 어찌 우리가 침략해 차지했다고 하는가?"는 말과 "게다가 압록강 안팎도 우리 땅"이란 말입니다. 그간 학계에서는 서희가 말한 '우리 땅'의 의미를 고구려의 옛 땅으로 해석했지만 서희가 활동했던 시점은 고구려가 멸망하고 300년이나 지난 시점으로 그런 상황에서 옛 고구려 영토의 영유권을 내세워서 설득력을 얻을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로 볼 때 서희가 말한 우리 땅의 의미는 옛 고구려 영토가 아니라 고려 당대의 영토를 말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합니다.즉, 제1차 여요전쟁 이전부터 고려와 요나라 양국 간 국경은 압록강이었는데 요나라의 동경 요양부가 압록강 안쪽 고려 영토인 곳에 있었기에 서희가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압록강을 요하로 놓고 설명하면 "동경 요양부가 우리 땅에 있어야 한다"는 서희의 말이 명쾌하게 설명이 됩니다.
1-3.고려와 금나라의 국경 신라산
1125년에 금 태종의 즉위식 참석을 위해 송나라 사신으로서 금나라를 방문한 허항종(許亢宗)이 쓴 선화을사봉사행정록에 따르면 고려 국경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29일 차 노정 : 함주(鹹州)에서 40리를 가면 숙주(肅州)에 이르고
또 50리를 가면 동주(同州)에 이른다. (
...중략)
동쪽으로 천산을 바라보니 금나라 사람이 말하기를,
‘이것은 신라산(新羅山)이오. 산 속이 깊고 멀어서 갈 수 있는 길이 없소이다.
그 사이에선 인삼과 백부자가 나고 산 깊은 곳에 고려와 국경을 접하고 있소.’라고 했다.
산 아래에 이르러 행로가 가히 30리였다.
신라산이란 산이 고려와 금나라의 국경이라는 것인데 허항종 일행이 신라산을 목격한 것은 함주에서 동주로 가는 길목이었습니다. 먼저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함주의 위치를 찾아보면 오늘날 요령성 개원시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숙주에 대해선 오늘날 요령성 개원시 동북쪽이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동주는 요령성 개원시 남쪽 30리에 있다고 설명했는데 위 3곳 모두 오늘날 요령성 개원시를 중심으로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려와 금나라의 국경이 국사 교과서에 표기된 대로 압록강~원산만이라면 어떻게 요령성 개원시 일대에서 고려의 국경이 보인다는 말은 어불성설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요령성 개원시에서 평안북도 의주군까지는 직선거리로만 무려 264km나 떨어져 있고 또 방향도 남쪽이지 동쪽이 아닙니다. 결국 고려와 금나라의 국경은 오늘날 압록강 지역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걸 말해줍니다.
청나라 때 편찬된 흠정만주원류고에서도 고려와 금나라 사이 국경이었다는 신라산의 위치를 오늘날 요령성 철령시와 개원시 사이에 있다고 주해했는데 금사 외국열전 고려 조에는 고려의 영토에 대해 “압록강 이동, 갈라로 이남”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압록강이 과연 지금의 압록강이었겠는가? 철령시와 개원시 사이를 흐르는 강으로는 요하가 있습니다. 고려와 금나라의 국경인 신라산의 위치가 요령성 철령시와 개원시 사이에 있었고 고려가 압록강 동쪽에 있었다면 결국 고려의 국경인 압록강은 지금의 압록강이 아니라 요하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며 서희가 천재적인 외교술로 획득한 고려 강동 6주 또한 요하 인근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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