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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한국사의 미스테리/고려의 역사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으로 배우는 고려의 세종대왕 현종에 대해 우리가 모르는 것들

by 마음heart 2023.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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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으로 배우는 고려의 세종대왕 현종에 대해 우리가 모르는 것들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보려 합니다.현종은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서도 묘사되듯이 왕손이었으나 어린 시절 승려가 되어 절에서 한동안 지내다가 강조정변때 왕으로 옹립되었는데 조선 시대때 정변이후 왕으로 옹립되면 보통은 허수아비 왕으로 전락하기 마련인데 현종은 어떻게 고려의 세종대왕이라 불릴만큼 성군으로 불리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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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유일한 사생아 출신의 승려 출신 군주,고려의 황금기를 이끌다

1-1. 현종의 묘호 및 시호

1-2. 현종의 출생의 비밀

1-3.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사생아

1-4.성개방이 자유로운 고려

1-5.버드나무 가지에서 태어난 왕손

1-6.목숨을 위협받는 왕손

2.사찰속의잠룡 대량원군,드디어 고려 국왕으로 즉위하다

2-3.피난길에 모두 도망가버린 신하들과 홀로 왕의 곁을 지킨 지채문

2-4.현종의 퇴로를 열어준 충신 하공진

2-5.애전 전투에서 거란 본진과의 최후의 사투를 벌인 양규와 김숙흥

3.전쟁 수습 중 일어난 김훈·최질의 난 진압

3-1. 동여진 해적 방어

3-2.장인 감축과 농업 장려

3-3.고려 군현제의 확립

3-4.3차 고려거란전쟁과 금교역 전투 승리

3-5.현종의 의지

3-6.강감찬의 귀주대첩

4.동북아시아의 균형자 현종

4-1.서희,양규,강감찬도 아닌 고려거란전쟁의 진정한 종결자 현종

4-2.동북아 국제 질서의 재편

4-3.거란의 분열,대조영의 7세손 대연림의 발해부흥운동

4-4.문화 양성과 이른 나이의 요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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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유일한 사생아 출신의 승려 출신 군주-고려의 황금기를 이끌다

 

夫子曰, ‘有始有卒, 其惟聖人乎!’ 則我后之功高德冠, 絶于古今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시작과 마침이 한결 같은 것은 오직 성인뿐일 것!’이라고 하시었으니
우리 임금의 높은 공과 빼어난 덕은 고금에 다시 없을 것입니다.

/현화사비

修政公平, 寘民安輯, 內外底寧, 農桑屢稔. 比之周之成·康, 漢之文·景, 亦無愧矣.

공정하게 나라를 다스려 국민을 안정시키고 화합을 이루니 온 나라가 평안해지고 해마다 풍년이 들었다.
현종의 치세야말로 주나라의 성왕(成王), 강왕(康王)과 한나라의 문제, 경제에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고려사 - 최충의 논평

 

 

고려의 제8대 대왕. 묘호는 현종(顯宗), 시호는 원문대왕(元文大王)이었으며, 휘는 순(詢), 자는 안세(安世)였고, 승려 시절의 법명은 선재(禪齋), 즉위 전 봉호는 대량원군(大良院君)이었습니다. 나말여초의 난세를 종식시킨 태조 왕건의 손자이자 안종 왕욱의 아들이었으며 한국사에서 유일한 사생아 출신 군주로, 죽음의 위기에까지 몰렸던 불우한 어린 시절로 유명합니다. 태어나자마자 암울한 전란의 시대를 살았고, 몇 년 뒤 고아가 되었으며, 생명의 위협을 받던 중 강조의 정변으로 즉위했습니다. 이후 요나라의 명군이자 정복군주였던 제6대 황제 성종과 명장이었던 동평군왕 소배압의 두 차례에 걸친 대침공을 맞아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속에서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던 중 참담하고 위급했던 시련들도 있었지만, 이를 모두 극복하면서 거란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고려의 번영을 이끈 성군으로 추앙받기에 이릅니다. 생애 내내 이어졌던 고생 탓인지 38세를 일기로 요절했지만, 재위 기간 동안 나라 안팎의 모든 위난을 평정하고 다양한 분야에 걸쳐 여러 제도의 기틀을 확고히 다지는 탁월한 업적을 쌓았습니다. 이러한 치적에 힘입어 고려는 제8대 현종에서 제17대 인종 때까지 무려 130년이 넘게 지속되는 기나긴 황금기에 접어들었으며, 동아시아 3국(고려 - 거란 - 북송)간 (균형적) 국제관계의 한 축을 담당하는 나라로 거듭났습니다. 또한 이후 고려 왕실이 현종의 혈통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고려 왕조의 제2의 건국 군주이자 중흥지주에 해당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1-1. 현종의 묘호 및 시호

 

 

 

①묘호: 현종(顯宗)

②태묘 악장: 성조(聖祖), 열조(烈祖)

③불천위: 세종(世宗)

④시호: 대효덕위달사원문대왕(大孝德威達思元文大王)

⑤공식 묘호는 '현종'(顯宗)으로 시법에서 '현(顯)'은 "업적이 나라 안팎으로 널리 알려졌다."는 의미로 태조 왕건의 능호 현릉도 이 '현' 자입니다.

 

최충헌 집권기인 제21대 희종 4년, 7묘 9실 종묘 제도를 정비할 때, 혜종과 현종은 어떻게 해야 할지 갑론을박이 펼쳐졌는데 제2대 혜종은 태조의 장남으로서, 제8대 현종은 중흥군주로서 모두 지위가 높았기 때문에 결국 희종은 혜종, 현종 두 사람을 '문경지치'를 이룩한 전한 태종 문황제 유항, 한 왕조의 최전성기를 이룩한 전한 세종 무황제 유철에 비유해 모두 불천위로 정했습니다.

 

제25대 충렬왕의 시책에 의하면 현종은 만사불천지종(萬祀不遷之宗)이 되었는데 그래서 제23대 고종 41년 강도에서 태묘 제사를 지낼 때 올린 책문에서는 현종을 세종대왕(世宗大王)이라 칭했습니다. 공식 시호는 대효덕위달사원문대왕(大孝德威達思元文大王)이며 장자 덕종(제9대)이 첫번째 시호를 '원문'(元文)으로 올렸습니다. 이후 셋째 아들 문종(제11대)이 재위 10년(1056년)에 '대효'(大孝), 고손자 인종(제17대)이 재위 18년(1140년)에 '덕위'(德威), 7대손 고종이 재위 40년(1253년)에 '달사'(達思)를 추증했습니다.

 

고려 군주들의 시호 중에는 처음 올려진 두 글자 시호가 가장 중요한데 그래서 현종의 묘호와 시호를 같이 부를 때는 '현종 원문대왕'(顯宗 元文大王), 사서 중 고려사 현종 세가 -총서-, 동국통감에서는 줄여서 '현종 원문왕'(顯宗 元文王)이라고 하며 동문선에는 9대손인 충렬왕이 아버지 원종(제24대)을 태묘에 제사지낼 때 현종에게 시호를 추가로 올렸음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때 쓰인 죽책문에는 현종 성렬대왕(顯宗 聖烈大王)이라는 존호가 나옵니다.

 

현종 재위 13년인 1022년에 세워진 '사자빈신사지석탑'엔 '성왕항거만세'(聖王恒居萬歲) 즉 '성왕(聖王)께서 아주 오랜 세월(萬歲) 동안 (천하에) 문제없이 거주하길 바랍니다.' 라고 하며 그의 장수를 기원했습니다. 역시 현종 재위 중에 세워진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비'엔 현종을 '만승'(萬乘)이라 하고, 그의 뜻을 '천심'(天心), 은혜를 '제택'(帝澤)이라고 표현했으며 현화사비에선 '만승'(萬乘), 독특하게 '제천(諸天)이 수호하는 인왕(人王)'으로 묘사되었습니다.

 

1-2. 현종의 기구한 출생 및 생애

 

현종은 고려 안종과 헌정왕후의 사생아로 태어난 데다 서너 살 즈음에 양친이 모두 세상을 떠나 고아가 되었으며 유년기에는 자신의 이모 천추태후로부터 목숨을 위협받던 와중에 황제가 되어 끝내 개인의 고난과 나라의 국난을 모두 극복한 뒤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연 말 그대로 파란만장한 불세출의 영웅적 삶을 살았던 군주입니다.현종은 후에 안종으로 추존되는 태조 신성대왕의 8남인 안종 왕욱과 천추태후의 여동생이자 경종(제5대)의 미망인이었던 헌정왕후 사이의 소생으로 역대 한국 왕조 중에 서자 출신 군주는 자주 나왔지만 부모가 정식적인 혼례 절차없이 사생아로 태어난 군주는 고려 현종이 유일합니다. 부계와 모계 모두 종실의 혈통이라서 그나마 나았던 것이지 사생아는 서자보다 훨씬 더 정통성에 위협을 받기 쉬운 위치였는데 신라 효공왕(제52대)이나 고려 말 우왕(제32대)의 경우도 정황상 사생아에 가까운 위치였으나, 현종과는 달리 전대 군주인 진성여왕과 공민왕이 직접 정통성을 보증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비참한 끝을 맞이하고 맙니다.

 

1-3.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사생아

 

현종의 혈통 자체는 태조의 직계였기에 흠잡을 곳이 없었지만 불륜 관계에서 태어난 것 때문에 정통성이 크게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현종 안종 태조 신성왕후 헌정왕후 대종 태조 신정왕후 선의왕후 태조 정덕왕후 즉,현종은 태조의 손자이자 외증손자이고, 구 신라 김씨 왕실의 외손자이며, 유력한 대호족 황주 황보씨의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태조의 적자이자 경순왕 김부의 백부 김억렴의 외손자였고, 어머니는 태조의 적손녀이면서 외손녀였습니다. 태조의 유전자를 부계에서 1/4, 모계에서 1/4(=1/8+1/8) 도합 1/2만큼 물려받았으니 유전적으로는 태조 왕건의 아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현종의 아쉬운 정통성은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견제로 설명할 수 있는데 당시 목종은 후사가 없어 그가 사망하면 현종이 가장 보위에 가까웠는데 천추태후는 이를 잘 알고 있었고, 현종을 신혈사에 보내버린 뒤 누차 살해를 시도했는데 이런 노골적인 차별이 가능했던 이유는 현종이 태어나면 죽어야 하는 사생아였기 때문입니다.

 

고려 황실, 신라 황실, 고구려계 호족의 피를 모두 물려받은 현종의 저 어마무시한 혈통이 사생아라는 커다란 단점 때문에 다 깎여버린 셈이며 다른 예로 천추태후와 김치양 사이에 태어난 아들의 경우 현종과 마찬가지로 사생아로 태어난 김치양의 아들은 현종과 같은 정통성이 없었고, 태후가 실각하자마자 6세의 나이에 아버지와 함께 처형당하고 맙니다.참고로 안종은 936년~943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이 때 태조의 나이는 61~67세로 현종은 992년생입니다. 즉 안종은 49~56세 때 현종을 낳았기에 태조와 현종은 할아버지-친손자 관계임에도 115살이나 차이가 나는데 현종은 태조가 죽고 49년이 지나서야 태어났습니다. 1-3.출생의 비밀 현종은 고려 황실과 신라 황실의 핏줄을 모두 가진 매우 고귀한 혈통의 소유자였지만 문제는 현종이 아버지 왕욱과 어머니 헌정왕후가 일단 숙부와 조카라는 근친 관계였으며 심지어 정식으로 혼인도 안한 상태에서 사통을 하여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1-4.성개방이 자유로운 고려

 

사실 고려 황족들은 정권 초기에 정치적인 이유로 이복남매끼리 혼인할 정도로 근친혼을 적극적으로 장려했기 때문에 숙부-조카 간의 관계 자체는 큰 문제라고는 볼 수 없었는데 고려의 여러 임금들 역시 과부를 후궁으로 들이기도 했고, 애초에 고려 문화권에선 재가 또한 비교적 자유로웠기에 재혼 또한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진짜 문제는 헌정왕후가 선왕 경종의 왕후이자 현 임금인 성종의 여동생으로서, 고려 왕실 내에서도 지체 높은 신분을 가진 여인이었는데 정식 혼인을 하지 않은 채 삼촌과 사통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선왕의 왕후가 숙질간의 근친상간으로로 사생아를 낳은 게 문제였습니다.덧붙여 현종은 그 전까지 있었던 근친혼에다 친부모가 서로 숙질관계인 점 때문에 친척 관계가 무척 꼬여버리는데 아버지는 태조 왕건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태조 왕건의 손녀이기 때문에 현종이 대량원군이던 시절 재위하던 왕들과의 관계가 심히 복잡했습니다.

 

먼저 성종의 경우 모계로는 어머니 헌정왕후가 성종의 친여동생이기에 성종의 외조카이지만, 부계로는 아버지인 안종이 성종의 숙부이기에 성종의 사촌동생이 됩니다. 목종은 더 복잡한데 모계로는 어머니가 목종의 어머니 헌애왕후(천추태후)의 친여동생이여서 목종의 이종사촌 동생이지만, 부계로는 어머니가 자신과 같은 항렬인 사촌누나이고, 목종의 당숙이 됩니다.그러므로 사촌 누나이자 이모 천추태후의 남편 경종은 현종에게 사촌형 겸 이모부이며, 생모 헌정왕후는 어머니 겸 사촌 누나가 됩니다. 또한 외할아버지 대종은 큰아버지이기도 하고. 그리고 할아버지인 왕건의 경우 현종의 외증조부이자 외외증조부(어머니의 외할아버지)가 되기도 합니다. 훗날의 일이지만 사촌형이자 외삼촌인 성종의 2비 문화왕후의 딸은 현종의 1비 원정왕후이고, 성종의 후궁 연창궁부인의 딸은 현종의 2비 원화왕후가 되었습니다.따라서 성종은 현종의 장인이 되는 셈인데 이 때문에 현종이 태조의 손자 자격이 아닌, 성종의 양자 내지는 사위 자격으로 제위를 계승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현종의 아들들이자 후계자인 덕종, 정종은 원성왕후 김씨, 문종은 원혜왕후 김씨 소생으로 원평왕후까지 합쳐서 이 세 명은 신라 왕족 출신의 공주 사람 김은부의 딸들로, 거란의 2차 침입을 피해 전라도 나주로 피난을 갔던 현종이 개경으로 돌아오던 길에 공주에서 당시 절도사로 있던 김은부의 집에 하룻밤을 묵게 되었을 때 김은부의 첫째 딸이 현종의 의복을 지었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현종이 왕후로 책봉하니 이 사람이 원성왕후이고, 나중에 남은 두 딸도 모두 왕후로 들이니 모두 친자매들이었습니다. 현종은 출생 비화도 꽤 드라마틱한데 만삭의 헌정왕후가 안종 왕욱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집안 사람들이 뜰에 섶을 쌓고 불을 질렀습니다. 불길이 한창 맹렬하자 성종이 작은아버지이기도 한 왕욱 집에 무슨 일이 벌어졌냐고 빨리 가서 알아보라 하여 연유를 알아보니, 왕욱이 윤리를 어지럽힌 죄를 범했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이에 놀란 성종은 '숙부께서 대의(大義)를 범했기 때문에 유배보내는 것이니 애태우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며 왕욱을 멀리 사수현(현재의 경상남도 사천시)으로 귀양보내기에 이릅니다.

 

1-5.버드나무 가지에서 태어난 왕손

 

소식을 들은 헌정왕후는 큰 충격을 받은 채 집으로 돌아왔는데 문에 이르자마자 산통이 와서 방에서 출산한 게 아니라 문 앞의 버드나무 가지를 휘어잡으면서 아이를 낳았고 결국 산욕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었습니다. 하지만 현종이 세운 현화사비에는 헌정왕후가 이듬해 별궁 보화궁에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신빙성을 따지자면 보통은 당대의 1차 사료인 현화사비의 신빙성이 더 높지만 현화사비는 그 내용이 (특히 친부 왕욱 관련해서) 고려사와 차이가 많이 나서 다소 신빙성을 의심받긴 합니다. 현종은 출생 후 1년 정도만에 졸지에 고아 신세가 되었고, 성종이 보모로 하여금 아기를 기르게 했는데 보모는 아기였던 대량원군(현종)에게 "아빠"라는 단어를 종종 가르쳤으며 그 때문인지 2년 후 성종이 대량원군을 불렀을 때 성종을 보더니 "아빠"라고 불렀고, 또 성종의 무릎 위로 올라와 성종의 옷을 붙잡고 한 번 더 "아빠"라 불렀다고 합니다. 이에 성종은 부모없이 자라는 아기의 처지가 너무 가엾어서 눈물을 흘렸고, 아버지와 떨어진 아이의 처지를 불쌍히 여긴 성종은 후에 '대량원군'이라는 작위를 내려 귀양지에서 지내던 왕욱에게 보살피도록 배려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위 내용을 색다른 시각으로 각색해보면, 헌정왕후가 타계하고 궁궐 내에 끈이 떨어진 대량원군이 궁궐 밖으로 내쳐진 것으로 볼 수도 있는데 성종 입장에서는 현종이 향후 제위 계승 문제에서 문제만 일으킬 가능성이 있는 아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성종 본인 슬하에 아들이 없으니 다음 왕위는 천추태후의 아들 목종에게 이어질 수 밖에 없는데 그러한 성종 입장에서 보면 현종은 후계 구도를 망쳐놓을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현종을 자신의 양자로 들여도 되겠지만, 출신이 사생아라 잡음이 많겠고 친부를 알려주지 않아야 혼란이 오지 않을 테니 이 역시도 끌리는 선택은 아니었으며 다 떠나서 친부랑 같이 살게 하는 것이 인륜적으로 맞는 선택이었고 그렇게 부자 상봉의 기쁨을 맞이했지만 그것도 잠시, 왕욱도 얼마 지나지 않아 현종이 5세였을 때 병사하고 맙니다. 한 순간에 아버지를 잃은 뒤 홀로 지내던 현종에겐 슬퍼할 새도 없이 또 불행이 닥쳤는데 친부의 사망 이후에 늘 현종을 보살펴주던 외삼촌 성종도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그 뒤를 이어 경종의 아들인 개령군이 목종으로 즉위하자 곧 험난한 시련에 부딪치게 됩니다.

 

1-6.목숨을 위협받는 왕손

 

비록 사생아 출신이라고는 하나 현종 역시 엄연한 왕족이며, 태조 왕건의 직계 후손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목종이 즉위한 후로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후사로 삼으려 했던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의 경계를 받게 되는데 당시에 외척인 김치양과 간통을 하며 성년이 된 목종을 억누르고 섭정하는 등 나라의 실세 행세를 하던 천추태후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하여금 다음 보위를 잇게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 천추태후에게 현종의 존재는 후사를 위협하는, 굉장히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었던 존재였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현종이 영특하다는 소문이 돌자 천추태후는 위협감을 느꼈는지 결국 현종을 강제로 머리를 깎게 한 뒤 양주 삼각산에 있는 신혈사라는 절에 승려로 보내버렸으며 , 임금의 서자로서 출가하여 승려가 된 자에게 주어졌던 호칭인 '신혈소군'(神穴小君)으로 부르게 하고 이후로도 그를 암살하고자 몇 번이나 자객을 보냈습니다. 이때에 현종은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보낸 궁녀들에게 독이 든 음식을 먹을 것을 강요받거나 자객들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등 그야말로 비참하고도 처절하게 생명줄을 이어나갔는데 왕순이 채충순에게 편지를 보내어 살려달라고 간청하기도 합니다.

 

간악한 무리들이 사람을 보내어 협박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술과 음식을 보냈는데 신은 독약을 넣은 것으로 의심하여 먹지 않고 까마귀와 참새에게 주니 까마귀와 참새가 죽어버렸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절박하니, 바라옵건대 성상께서 불쌍히 여겨 구원하여 주소서.

/고려사 권93, 열전6, -채충순-

 

그러나 다행히도 목종이 번번히 천추태후의 음모를 눈치채고 암살시도에도 벗어나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목종은 자식이 없어 본인이 죽으면 남은 태조 왕건의 적자에게서 태어난 핏줄은 대량원군 하나뿐이라 갖은 수를 써가면서 대량원군을 필사적으로 지켰습니다. 왕건에겐 비록 자식이 많긴 했지만 후궁이 아닌 왕후의 핏줄을 이어받은 자들은 왕건 사후의 고려 초기 피튀기는 황위쟁탈전으로 하나하나 대가 끊겨 첫째 혜종부터 일곱째 대종까지의 피를 이어받은 자는 사실상 목종이 마지막이었고 여덟째인 안종의 피를 이어받은 현종이 가장 계승 순위가 높은 상황이었습니다.또 신혈사의 주지인 승려 '진관'(津寬)도 위험을 무릅쓰고 현종을 보호하였던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는데 천추태후가 어찌나 집요하게 현종을 암살하려 했는지 진관이 현종이 머물던 방 아래에 굴을 파서 현종을 숨겨놓기까지 했다고 하는데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서도 이와같은 사실을 바탕으로 현종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태후가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암살하려 했으며, 하루는 내인(內人)을 시켜 독약이 든 술과 떡을 보냈다.
내인이 절에 당도해 소군을 만나 몸소 먹이려 했는데, 절의 어떤 승려가 소군을 땅굴 속에 숨겨 놓고는,
“소군이 산에 놀러 나갔으니 간 곳을 알 수 없노라"고 속임수를 썼다.
내인이 돌아간 뒤 떡을 뜰에 버렸더니, 까마귀와 참새가 주워 먹고 그대로 죽어 버렸다.


/고려사 권88, 열전1 -후비-1, '경종 후비, 헌애왕태후'

 

 

그 후 강조의 정변으로 목종이 시해당하고, 천추태후가 실각하는 사태가 일어나자 현종은 강조에 의해 왕위에 올랐는데 참고로 고려사 세가의 -현종 총서-를 보면, 현종 역시 보위에 대한 야심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려사의 -현종 총서-에는 현종이 등극하기 전 잠룡 시절 지었다는 두 수의 시가 기록되어 있는데, 이 시를 읽어보면 꽤 의미심장합니다.

 

一條流出白雲峯일 조 유 출 백 운 봉
한 가닥 물줄기가 백운봉에서 솟아나
萬里蒼溟去路通만 리 창 명 거 로 통
머나먼 큰 바다로 거침없이 흘러가니
莫道潺湲巖下在막 도 잔 원 암 하 재
바위 밑 샘물이라 업신여기지 말지라
不多時日到龍宮불 다 시 일 도 용 궁
머잖아 용궁까지 다다르게 될 물이니

시냇물(溪水).

 

小小蛇兒遶藥欄소 소 사 아 요 약 란
뜰 난간에 또아리 튼 작은 뱀 한 마리
滿身紅錦自班斕만 신 홍 금 자 반 란
붉은 비단같은 무늬 온 몸에 아롱지니
莫言長在花林下막 언 장 재 화 임 하
꽃덤불 아래서만 노닌다 말하지 말라
一旦成龍也不難일 단 성 용 야 불 난
하루 아침에 용 되기 어렵지 않으리.

작은 뱀(小蛇).

 

 

신증동국여지승람 사천현 조에 따르면 2번째 시 작은 뱀을 지은 곳(현종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자 현종의 아버지 왕욱이 유배되어 있던 사천시 배방사라고 하며, 절은 현재는 터만 남아 있습니다.)은 보위에 오르기 전 현종이 있었던 신혈사(은평구 진관동에 위치한 북한산 진관사)의 진관은 위에 언급된 현종을 보호해준 승려의 이름을 딴 것으로 본래 신혈사는 큰 절이 아니라 진관이 혼자 수행하던 작은 암자였는데, 제위에 오른 현종이 진관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신혈사를 큰 절로 증축해 주었고, 진관의 이름을 따서 절 이름도 진관사라고 붙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대의 지명도 이 이름을 딴 진관동으로 본래는 진관내동, 진관외동 이렇게 따로 있었으나, 2007년 은평뉴타운이 조성되면서 구파발동과 함께 통합되었는데 은평뉴타운이 바로 이곳이기도 합니다.진관사의 건물들은 화재로 여러차례 소실과 중건이 반복되다가 6.25 전쟁때 3동을 뺀 나머지가 완전히 박살나고 1964년에 재건되었으며 고려시대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2.사찰속의잠룡 대량원군,드디어 고려 국왕으로 즉위하다

 

1009년 2월 3일, 강조의 정변이 터지고 강조는 목종을 '나라를 양보했다'는 뜻의 "양국공(讓國公)"으로 강등하여 폐위하고 법왕사로 내쫓아 버렸으며 대량원군은 본궐 연총전에서 즉위합니다. 드디어 우여곡절 끝에 보위에 오른 현종은 등극하자마자 교방(敎坊)을 없애고 궁녀 100여 명을 돌려보냈으며 낭원정(閬苑亭)을 헐어 진기한 날짐승과 길짐승 및 물고기들을 산과 못에 풀어주었습니다. 이때 현종이 비록 강조의 정변으로 강제로 옹립됐다고는 하지만 자신이 내세운 임금의 권위가 실추되기를 원하는 권신은 없을 테니 현종 스스로의 결정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사실 강조 입장에서는 목종의 명을 받고 왔다가 카더라에 낚여 일을 저질렀으니 억울할 만도 한데, 안정복은 아예 현종이 정변의 주체라고 지목하기도 했습니다.그 후 문무 관료를 재편하고, 세금과 요역을 경감해 주었으며 또 거란에 사신을 보내고, 군량을 비축하고, 현종 개인으로서도 성종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등 무난하게 정치를 해나가면서 즉위년 12월 다음과 같은 하교를 내렸습니다.

 

짐이 외람되게 조업(祖業)을 이어받아 삼가 큰 기반을 계승하면서,
현도(玄菟)의 봉강(封疆)을 통치하고 황천(皇天)의 권명(眷命)을 받들게 되었다.
그동안 백성들을 자애롭게 기르느라 쉴 틈이 없으면서도 하나의 덕(德)이라도 미덥지 못할까,
혹은 올바른 윤리가 무너질까 늘 염려했다. 그리하여 부지런히 여론을 듣고 단안을 내렸으니
이는 태평성대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얼마 전 가을철이 되었는데도 이상하게 안개가 걷히지 않았으며 음양(陰陽)이 뒤죽박죽되어 기후가 불순했다.
이에 더욱 성의껏 정무를 돌보면서 스스로를 통절히 자책하느라,
정전(正殿)에 들지 않고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며 부지런히 일하면서 마음과 입으로 빌었더니,
과연 하늘의 감응을 받아 날씨가 맑고 화창해졌다.
이로 보건대 성심을 다하기만 하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으며 재난을 복으로 바꿀 수 있음을 알겠다.
이제부터 가일층 성심을 다하고 두려워함으로써 위로 하늘의 뜻에 부응할 것이며,
더욱 나라를 열심히 돌보고 정사에 정력을 다 바칠 것이다.
그러나 나라의 온갖 일들을 혼자서 처리하기는 어려운 법이니
마땅히 신하의 도움을 받아 함께 건곤지도(乾坤之道)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이제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깊이 아로새겨야 할 바를 몇 가지 제시하노라.
재상의 직위는 실로 백성들이 우러러보는 자리이니 정치에 있어
임금이 빠뜨리는 것을 보완(彌綸)하고 적절한 정책(謨明)을 건의할 것이며
치국의 근본이 어디에 있는가를 헤아려 왕업을 도우라.
인재를 가려내고 관리를 선발하는 직무를 맡은 사람들은 초야에 묻힌 현인을 잘 찾아내어
그가 버림받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며 인사에 공정을 기함으로써 아부하는 무리들의 말을 배격하라.
법령과 규율을 집행하는 사람들은 죄상을 심리하고 판결을 내림에 있어 죄인을 불쌍히 생각해
가혹한 행위나 형벌을 내리지 말 것이며, 정상을 잘 참작함으로써 억울함이 없도록 하라.
국가 행정의 각 분야를 맡은 사람들은 각별히 서로 협조해 직무를 집행[官聯]하도록 할 것이며
자신이 맡은 업무에 성실히 임하라. 또한 청렴을 장려하고 혼탁한 행동을 방지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을 것이며,
멸사봉공의 자세에 어긋나지나 않는지 늘 반성하라.
지방의 목민관들은 각자 애민 정신을 간직하고 만물을 아끼는 마음을 잊지 말라.
변방을 지키는 지휘관들은 부대를 잘 조련하여 용맹한 군사를 길러냄으로써 불의의 사태에 힘써 대비하고 군율의 해이를 경계하라. 아! 너희들 중앙과 지방의 관료들은 밤낮으로 게으르지 말고 시종일관 충성을 변치 말지어다.
아! 하늘이 가까이 감시하면서 이미 훈계를 내리셨으니 내 마음이 게으르지 않아 이미 하늘에 감응한 바 있도다.
이제 더욱 정성스럽게 나의 행동을 반성함으로써 나날이 새롭게 경사를 더해가기를 기대하노니
그대들과 함께 나라를 다스려 미래를 보장받기를 원하노라.

고려사 세가, 현종 원년(1010년) 경술년

 

 

2-1.제2차 고려거란전쟁 발발

 

그러나 보위에 오른 뒤 오래 지나지 않아 또다시 시련이 닥쳐왔는데 현종 2년, 거란 성종이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침략을 감행해 온 것입니다. 침공의 명분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시해한 강조의 죄를 묻겠다는 것이었으나 실상은 북송과의 통교를 저지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결국 현종은 자신의 치세에 자신의 목숨과 나라의 존망을 걸고 두 차례에 걸쳐 거란의 대침공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기해.

강조(康兆)가 병사들을 이끌고 통주성(通州城) 남쪽으로 나가 군사들을 세 부대로 나누어 강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한 부대는 통주의 서쪽에 진영을 만들어 삼수채(三水砦)에 주둔하였고, 강조가 그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또 한 부대는 통주 인근의 산에 진영을 만들었고, 다른 한 부대는 통주성에 붙어서 진영을 만들었다.
강조가 검거(劍車)를 배치하여 거란(契丹)의 병사들이 침입하면 검거가 함께 공격하였으니, 쓰러지지 않는 자들이 없었다.
거란 병사들이 누차 패퇴하자 강조는 마침내 적을 경시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과 바둑을 두었는데,
거란의 선봉장이었던 야율분노(耶律盆奴)가 상온(詳穩) 야율적로(耶律敵魯)를 거느리고 와서 세 강의 합류지점에 있던 진영을 격파하였다. 진주(鎭主)가 거란의 병사들이 이르렀다고 보고하였음에도 강조는 믿지 않고 말하기를,

“입 속의 음식과 같아서 적으면 좋지 않으니, 많이들 들어오게 놔두라.”라고 하였다. 재차 급변을 보고하여 말하기를,
“거란 병사가 이미 많이 들어왔습니다.”라고 하니, 강조는 깜짝 놀라 일어나며 말하기를, “정말인가.”라고 하였다.

마치 목종(穆宗)이 그 뒤에 서서 “네놈은 끝났다. 천벌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라고 그를 꾸짖는 모습을 보고 있는 양 몽롱한 상태가 되더니, 강조는 즉시 투구를 벗고 꿇어앉아 말하기를,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말을 미처 다 마치기도 전에 거란 병사들이 들이닥쳐 강조를 결박하였다. 이현운(李鉉雲)과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郞) 노전(盧戩), 감찰어사(監察御史) 노의(盧顗)·양경(楊景)·이성좌(李成佐) 등은 모두 사로잡혔으며, 노정(盧頲)과 사재승(司宰丞) 서숭(徐崧), 주부(注簿) 노제(盧濟)는 모두 전사하였다.

거란이 담요로 강조를 말아 싣고 가버림으로써 아군이 큰 혼란에 빠지니, 거란 병사들이 승기를 타고 수십 리를 추격하여 30,000여 급의 머리를 베었고, 버려진 식량·갑옷·무기들은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거란의 군주가 강조의 결박을 풀어주고 묻기를, “너는 나의 신하가 되겠느냐.”라고 하니, 강조는 대답하기를,

“나는 고려(高麗) 사람이다. 어찌 다시 너희의 신하가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재차 물었으나 대답은 처음과 같았고, 다시 살을 찢으며 물었으나 대답은 또한 처음과 같았다. 거란의 군주가 이현운에게도 물어보니, 대답하기를,

“두 눈이 이미 새로운 해와 달을 보았는데 하나의 마음으로 어찌 옛 산천을 생각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강조가 분노하여 이현운을 걷어차면서 말하기를, “너는 고려 사람인데, 어떻게 이런 말을 하는가.”라고 하였다. 이때에 거란 병사들이 멀리까지 말을 달려 전진하였는데, 좌우기군장군(左右奇軍將軍) 김훈(金訓)·김계부(金繼夫)·이원(李元)·신영한(申寧漢)이 병사들을 완항령(緩項嶺)에 잠복시켰다가 모두 단병(短兵)을 집어 들고 갑자기 튀어나와 패배시키니, 거란 병사들이 조금 물러났다.강조가 방심하다가 거란군에게 대패하여 붙잡혔으나, 끝내 절의를 꺾지 않다

고려사절요 권3 현종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  현종(顯宗) 1년(1010년) 11월 24일(음) 기해(己亥))

 

2.2.거란 성종의 2차 침공과 목숨을 건 피난길

 

파란만장한 현종의 피난길

 

2차 침입 때는 거란 성종이 무려 40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오자 실권자였던 강조가 300,000명의 대군을 몰고 나가 이를 막으려 했는데 초반엔 강조의 고려군이 우세를 점했으나 한순간의 방심으로 인해 통주 대전에서 대패한 강조는 그대로 거란군에게 붙잡혔다가 이후 처형당했고, 30만 고려군들 또한 전사자만 무려 3만명이나 발생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서 완전히 와해되어 버리고 맙니다.

 

신해 2년(1011) 봄 정월 을해 초하루 거란주(契丹主)가 개경(開京)에 들어가 태묘(大廟), 궁궐, 민가(民家)를 불살라서 모두 타버리다. 이 날 왕은 광주(廣州)에 묵었다.
거란군이 개경에 들어와 태묘 등을 불태우다

/고려사 현종(顯宗) 2년(1011년) 1월 1일(음) 을해(乙亥)) 봄 정월 을해 초하루.

 

거란(契丹)의 군주가 경성에 들어와 태묘(大廟)·궁궐·민가를 모두 불태워버렸다. 이날에 왕이 광주(廣州)에 머물고 있다가 두 왕후가 있는 곳을 알 수 없어 지채문(智蔡文)으로 하여금 가서 찾아보게 하였는데, 요탄역(饒呑驛)까지 가서 이내 찾아 모시고 돌아오니, 왕이 기뻐하며 3일간 머물렀다. - 거란이 개경을 점령하다

/고려사절요 현종(顯宗) 2년(1011년) 1월 1일(음) 을해(乙亥)

 

결국 이 통주 전투에서의 대패로 인하여 고려의 수도 개경이 처음으로 외적들에게 함락되었고 현종은 호남 지방인 나주까지 피난을 가는 등 온갖 고초를 겪게됩니다. 400km의 고립을 감수하는 요나라 성종의 대담한 결단에 고려 조정은 경악했지만, 결국 강감찬 등의 주장으로 항복이 아닌 항전의 뜻을 굳힌 현종은 몽진을 결정하기에 이릅니다.

정축 왕을 호종하던 여러 신하가 하공진(河拱辰) 등이 잡혔다는 것을 듣고 모두 놀라고 두려워 뿔뿔이 도망쳤으며, 오직 시랑(侍郞) 충숙(忠肅), 장연우(張延祐), 채충순(蔡忠順), 주저(周佇), 유종(柳宗), 김응인(金應仁)만이 떠나지 않았다. - 왕을 호종하던 신하들이 도망치다

/고려사 현종(顯宗) 2년(1011년) 1월 3일(음) 정축(丁丑)) ○기묘.

 

유종(柳宗)이 아뢰기를,

“양성(陽城)은 신의 적향(籍鄕)으로서 여기에서 거리가 멀지 않으니 청하건대 그곳으로 행차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기뻐하며 마침내 행차하였다. 밤에 유종과 김응인(金應仁) 등이 왕명을 조작하여 어마의 안장을 뜯어 고을 사람들에게 주었으며, 날이 밝아오자 현의 아전들은 모두 도망가 버렸다. 유종과 김응인 등은 또한 두 왕후를 각자 그 고향으로 보내고 호종하던 장수와 병졸들을 해산시켜 동쪽 변방으로 가서 위급상황에 대비하게 하자고 청하였다.

왕이 지채문(智蔡文)에게 자문을 구하자 지채문은 대성통곡을 하면서 말하기를,

“지금 군주와 신하가 도리를 잃어버리고 뜻하지 않게 재앙을 당하여 이와 같이 피난을 오게 되었습니다. 마땅히 인의(仁義)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인심을 수습하셔야 하는데, 왕후를 버리고서 살기를 구하는 짓을 차마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은 말하기를, “장군(將軍)의 말이 옳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행렬이 사산현(蛇山縣)을 지날 때, 지채문은 여러 기러기들이 밭에 내려앉은 것을 보고는 왕의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기 위하여 말을 달려 앞으로 나아갔다.

기러기들이 놀라 날아오르자 몸을 돌려 올려다보며 활을 쏘았으며, 화살로 명중하여 떨어뜨렸다. 왕이 크게 기뻐하자 지채문은 말에서 내려 기러기를 들고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이러한 신하가 있는데 어찌 도적을 염려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왕은 크게 웃으며 안심하고 칭찬하였다. 천안부(天安府)에 이르렀을 때, 유종과 김응인 등은 아뢰기를, “신들이 청하건대 먼저 석파역(石坡驛)에 가서 음식을 마련한 뒤 영접하겠습니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도망쳤다. - 유종과 김응인이 왕을 속이고 달아났으나, 지채문은 성심껏 왕을 보필하다

/고려사절요 현종(顯宗) 2년(1011년) 1월 5일(음) 기묘(己卯)

 

현종(顯宗)은 채충순(蔡忠順)을 직중대(直中臺)로 삼았고, 얼마 후에 이부시랑 겸 좌간의대부(吏部侍郞 兼左諫議大夫)로 승진시켰다. 왕이 거란(契丹)을 피해 남쪽으로 갈 때, 채충순이 어가(御駕)를 호종하였으며 왕이 광주(廣州)에 머무르니, 수행하던 여러 신하들이 하공진(河拱辰) 등이 포로가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는 모두 놀라고 두려워 흩어져 도망하였으나, 오직 채충순은 시랑(侍郞) 충숙(忠肅)·장연우(張延祐)·주저(周佇)·유종(柳宗)·김응인(金應仁)과 함께 떠나지 않았습니다. 여러 차례 전임되어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 叅知政事)가 되었고, 추충진절위사공신(推忠盡節衛社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았으며, 제양현개국남(濟陽縣開國男)에 책봉되었고, 식읍(食邑) 300호를 받았다. - 채충순이 거란 침입으로 남행하던 현종을 호종하여 공신에 책봉되다

/고려사 권93  열전 권제6  제신(諸臣) > 채충순

 

2-3.피난길에 모두 도망가버린 신하들과 홀로 왕의 곁을 지킨 지채문

 

○중랑장(中郞將) 지채문(智蔡文)에게 토지 30결(結)을 하사하였다.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 “짐이 도적을 피하다가 먼 길 위에서 곤경에 빠졌을 적에 호종하던 신료들 모두 도망가 흩어지지 않은 자가 없었는데, 오직 지채문만이 바람과 서리를 무릅쓴 채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면서 말고삐를 잡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끝까지 소나무나 대나무 같은 절개를 지켰다. 특출한 공로를 생각하면 어찌 남다른 은전(恩典)을 아끼겠는가.” 라고 하였다. - 왕을 성심으로 호종한 공로로 지채문에게 토지를 하사하다

/고려사절요 현종(顯宗) 2년(1011년) 2월 미상(음)) 2월,

 

왕이 돌아오다가 공주(公州)에 이르러서 지채문(智蔡文)에게 토지 30결을 하사하였고,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 “짐이 적의 침략을 피하여 허둥지둥하며 먼 길을 갔는데, 호종하던 신료들이 모두 도망가 버렸다. 오직 지채문만이 온갖 풍상(風霜)을 무릅쓰고 산 넘고 물 건너며 말고삐 잡는 수고를 사양하지 않으면서 끝까지 송죽[松筠]의 절개를 지켰다. 참으로 빼어난 공적이 많으니, 어찌 특별한 은혜를 아까워하겠는가?”라고 하였다. - 현종이 공주에서 지채문의 호종 공적을 포상하다

/고려사 권94  열전 권제7 >제신(諸臣) 지채문

 

그러나 정작 이 피난길에서 신하, 병사, 노비들은 다 달아나 버리는 바람에 현종과 두 왕후를 수행하는 이는 지채문 등과 금군 50여 명이 전부였다. 앞서 주전론을 펼쳤던 문신들과 장수들마저 태반이 도망가 버렸기 때문에 사실상 지채문 혼자서 지켜낸 것과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심지어 이때 항전을 주장한 강감찬의 기록도 현종의 몽진 시기에는 사라져 버립니다. 도망갔거나, 아니면 다른 곳으로 파견을 갔다는 이야기인데, 다만 3차 침입 때 전군을 지휘하는 위치까지 오른 것을 보면 어딘가에 파견되어 방어선을 지휘한 것 아니냐는 설이 지배적입니다. 물론 강감찬 정도되는 거물이 진짜로 현종을 버리고 도망쳤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충신 강감찬의 포지션은 지채문이 차지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찌되었건 혼자서 현종을 지켜낸 지채문보다 강감찬이 후세에 더 알려진 것은 몽진을 수행하는 것 만큼의 급박한 임무를 맡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지채문은 이때의 공으로 크게 출세하긴 하지만 당시에는 장군이 아닌 중랑장 정도의 계급이었고, 후에 후손들이 멸문을 당했기 때문에 지채문의 존재감이 크게 기록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여하간 현종의 몽진길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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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유.
적성현(積城縣)단조역(丹棗驛)에 이르자 무졸(武卒)인 견영(堅英)이 역인(驛人)들과 함께 활시위를 당겨 장차 행궁을 범하려고 하니, 지채문이 말을 몰면서 활을 쏘았다. 적도가 달아나 흩어졌다가 다시 서남쪽의 산으로부터 갑자기 튀어나와 길을 막자 지채문은 또다시 활을 쏘아 그들을 물리쳤다. 날이 저물어서야 왕이 창화현(昌化縣)에 이르렀는데, 어떤 아전이 말하기를,

“왕께서는 저의 이름과 얼굴을 아십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못들은 척 하자 아전은 성을 내면서 장차 변란을 일으키고자 사람을 시켜 외치기를, “하공진(河拱辰)이 병사들을 이끌고 왔다.”라고 하였다. 지채문이 말하기를, “무슨 연유로 왔다는 것인가.”라고 하자 아전이 말하기를, “채충순과 김응인(金應仁)을 잡으려는 것일 뿐입니다.”라고 하니, 김응인과 시랑(侍郞) 이정충(李正忠), 낭장(郞將) 국근(國近) 등이 모두 달아났다. 밤에 적들이 다시 이르자 시종하던 신료·환관(宦官)·빈첩[嬪御]들이 모두 도망가 숨어버리고 오로지 현덕왕후(玄德王后)와 대명왕후(大明王后) 두 왕후와 시녀 2인, 승지(承旨) 양협(良叶)·충필(忠弼) 등만이 시종하였다. 지채문이 혹 나갔다가 혹 들어오면서 임기응변하자 적도들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날이 밝아오자 지채문이 두 왕후에게 먼저 북문을 통해 빠져나갈 것을 청하고 직접 어마의 고삐를 잡아 사이로 난 길을 통하여 도봉사(道峯寺)에 들어가니, 적들이 알아차리지 못하였으며 채충순도 연이어 도달하였다. 지채문이 아뢰기를, “지난밤의 적들은 하공진이 아닐 것으로 의심되니, 신이 가서 뒤를 쫒아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그가 도망갈 것을 두려워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지채문은 아뢰기를, “신이 만약 군주를 배반하여 말과 실상이 어긋난다면 하늘이 반드시 저를 주살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이에 허락하자, 즉시 창화현으로 가다가 길에서 국근을 만났다. 국근은 말하기를, “저의 옷과 행장을 모두 적들에게 빼앗겼습니다.”라고 하였다. 지채문은 말하기를, “너는 신하가 되어 충성을 바치지 못하였으니 머리를 보전한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때마침 하공진과 유종(柳宗)이 행재소로 가던 중이라 지채문이 길에서 그들을 만나 적들의 변란에 대해 상세히 말하며 이에 대하여 힐난하니, 과연 하공진의 소행이 아니었다. 하공진은 도중에 중군판관(中軍判官) 고영기(高英起)의 패전한 군대가 남쪽으로 달아나는 것을 보고 그들과 함께 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 당시 하공진이 거느리고 있던 군졸이 20여 인이었는데, 지채문은 마침내 그 군졸들을 데리고 창화현을 포위하여 적들이 탈취하였던 말 15필과 안장 10부(部)를 획득하여 가지고 돌아왔다. 지채문은 하공진 등에게 말하기를, “내가 그대들과 함께 가면 왕께서 분명히 놀라 동요하실 것입니다. 바라건대 그대들은 조금 뒤에 오십시오.”라고 하고 이후 홀로 나아갔다. 충필이 절의 문 앞에서 바라보고 있다가 들어가서 지 장군(智 將軍)이 왔다고 아뢰자 왕은 기뻐하며 문 밖으로 나와서 그를 맞이하였다. 지채문은 아뢰기를, “신이 적들이 탈취하여 숨겨둔 것들을 찾아내었는데, 실로 하공진의 소행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하공진과 함께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하공진과 유종을 불러 보고, 그들을 위로하였다. - 창화현의 이속들이 왕의 일행을 해하려 하였으나, 지채문이 물리치다

/고려사절요 현종(顯宗) 1년(1010년) 12월 29일(음) 계유(癸酉))

 

 

특히 몽진 도중 지방 호족들에게 푸대접을 넘어 신변의 위협을 받기 일쑤였는데 임진왜란 때 똑같이 몽진했던 선조도 이런 대우를 받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도중에 백성들이 '여기를 지키긴 할 거냐'라고 항의를 하는 일이 벌어지긴 했지만 선조가 나서서 설득하자 모두 순순히 돌아갔고, 그나마 평양에서 백성들이 폭발하여 왕의 행렬에 있는 사람들을 구타하기는 했지만 이 역시 주동자 몇 명을 잡아죽이자 해결되었습니다. 임금의 몽진에 고려와 조선의 백성들의 태도가 이처럼 다른 것은 강력한 중앙집권제였던 조선과 달리 현종 당시 고려는 지방분권에다 호족들의 세력이 막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라 말이나 고려 말은 이미 수십년간 중앙정부가 막장이 되면서 토호들이 스스로 나라나 다름없는 세력을 쌓고 수천명의 군대를 보유했을 만큼 호족들의 세력이 막강했는데, 목종 재위 말기가 혼란했다지만 그 지경까지 갔다고 볼 만한 정황은 보이지 않는데 목종을 폐위한 병력도 원래는 중앙군이었기도 하고. 현종을 위협했다는 아전도 호위 금군이 겨우 50명에 불과했으니 자기 가병만 가지고 임금을 위협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피난갈 때만 봐도, (조선과 고려) 백성들의 이데올로기가 달라요. 왕에 대한 개념 말이에요.
선조가 피난갔을 땐 주위의 백성들과 관리들이 왕에게 인사를 했어요. (중략)
근데 고려는 중세 유럽과 비교하면 봉건제와 같아요. 왕이 궁 밖을 나가는 순간,
나를 미워하는 모두의 라이벌 속으로 뛰어드는 거예요.

임용한. 토크멘터리 전쟁사 67부 -고려 vs 거란 전쟁2- 中

 

어쨌든 추격하는 무리들을 떨쳐낸 현종 일행이 창화현에 이르렀을 때 고을 아전이 현종의 일행을 보고 “임금께서는 나의 이름과 얼굴을 아시겠습니까." 라며 거만을 떨었고 현종은 그의 무례함에 화가 났지만 애써 모른 척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현종의 태도에 화가 난 아전은 사람을 시켜 '하공진이 군사를 거느리고 온다!'라고 외치게 했는데 당황한 지채문이 무슨 이유로 오느냐고 묻자 아전은 채충순과 김응인을 사로잡기 위한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이 말에 현종 일행은 크게 겁을 먹었습니다. 채충순과 김응인은 현종의 최측근이었으며, 하공진은 강조파이면서 이번 전쟁의 원인에도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겁에 질린 김응인은 시랑 이정충, 낭장 국근 등과 함께 달아나버렸으며, 밤이 되어 다시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적이 공격해오는 위기를 맞습니다. 당연하지만 고려의 호족들은 사병을 보유했으므로 조금 전 현종을 욕보인 아전과 연관된 군대라고 추정됩니다. 이 공격에 그나마 남아있던 신하, 환관, 궁녀들까지 죄다 도망가 숨어버리고 경종(제5대)의 후궁 대명궁부인, 성종(제6대)의 2비 문화왕후(당시 천추태후는 황주에 유배중)와 시녀 2명, 승지 몇 명만 남아 버립니다. 게다가 문화왕후의 딸인 현종의 1비 원정왕후는 이때 임신중이었는데 이렇게 위급한 상황에서 지채문만이 남아 한 줌 남은 근위대 병력으로 적을 물리쳤지만 말과 기물을 빼앗겼으며 경황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었습니다. 이후 상황을 사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는데

 

새벽이 되자 채문이 두 왕후에게 먼저 북문으로 탈출하여 나가기를 청하고, 손수 임금의 말을 몰고 사잇길로 가서 도봉사(道峯寺)로 들어가니 적은 이를 알지 못하였고 충순이 뒤따라 왔다. 채문이 아뢰기를, “지난 밤의 적은 공진(拱辰)이 아닌 듯하니 신이 가서 뒤를 밟아보겠습니다." 하였다. 왕은 그가 도망할까 두려워하여 허락하지 않으니 채문이 아뢰기를, “신이 만약 주상을 배반하여 행동이 말과 어긋난다면 하늘이 반드시 신을 죽일 것입니다." 하니, 왕이 그제야 허락하였다.

고려사절요 현종 세가 원년

 

 

2-4.현종의 퇴로를 열어준 충신 하공진

 

우여곡절 끝에 양주로 향한 지채문 일행은 달아났던 국근을 만나 합류하고 다시 하공진과 유종을 만났습니다. 지채문이 그들을 만나 정말 반역했냐고 묻자 하공진은 극구 부인했습니다. 그 다음 지채문은 하공진이 이끌고 있었던 병사 20여명을 데리고 양주로 돌아가 빼앗겼던 말과 안장을 되찾아왔습니다. 현종의 몽진은 이처럼 고난에 고난을 거듭했고,심지어는 중간에 왕후를 버려두고 뛰는 경우도 있었지만 거란군이 물러날 때까지 현종은 2차 침입 내내 전라도 전주, 광주, 나주를 전전하면서 무사히 몽진을 마치고 충청도 공주에서 새 장가를 드는 성과도 올렸습니다. 온갖 반란에 휘말리고 고초를 당하면서 피난을 가는 도중에 도와준 사람이 나주 백성들과 공주 절도사인 김은부 딱 1명이었다고 합니다. 어찌나 고마워했던지 현종은 나중에 전쟁이 끝나고 김은부의 딸 3명 모두를 왕비로 삼았습니다. 현종이 공주를 방문했을 때 지은 시가 한 수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曾聞南地在公州,仙境玲瓏永未休。 到此心情歡樂處,群臣共會放千愁
일찍이 남쪽에 공주라는 곳이 있다고 들었는데, 선경의 영롱함이 길이길이 그치지 않도다. 이렇게 마음 즐거운 곳에서 신하들과 함께 모여 온갖 시름을 놓아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이런 상황 속에서 결국 수도 개경이 거란군에게 함락되고 거란군은 개경에서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는데 이때 대량의 고서적, 특히 사서(史書)들이 불타 없어졌는데 역대 고려 왕조의 실록들도 소실되어서 이후 이를 복구하라는 현종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것이 7대 실록이었습니다.하공진은 오히려 자신이 거란주와 만나 화친을 설득하겠다고 말한 뒤 고영기와 함께 사신이 되어 북쪽으로 향했으며 현종은 남쪽으로 떠났는데 당시에 현종 일행은 창화현에서 갓 벗어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현종의 표문을 얻어 거란군 쪽으로 향하던 하공진은 창화현 관아에 닿기도 전에 거란군 선봉과 마주쳤는데 이때가 실로 고려 역사상 최고로 긴박한 순간으로 당시 거란 선봉군과 현종 일행의 거리는 10여리에 불과했습니다.만약 붙잡혔다면 인조가 청 태종 숭덕제 홍타이지에게 머리를 직접 조아렸던 삼전도의 굴욕의 프리퀄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공진은 거란군의 안내를 받아 성종을 만났고 고려의 남방은 수천리에 달하며 현종은 이미 그 밖까지 벗어났다고 속였습니다. 그러자 이미 퇴로가 위험하여 전세의 불리함을 깨달은 성종은 이 말을 믿고 고려 국왕의 친조(직접 황제를 알현함)를 조건 삼아 하공진을 인질로 잡고 퇴각하기에 이릅니다. 훗날 성종은 하공진을 회유하려 무던히 노력했지만 그는 고려로 탈출하려다 실패하여 붙잡혔고, 이때도 끝까지 전향을 거부했기 때문에 결국 거란 땅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하공진을 죽인 후 심장과 간을 꺼내 먹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하공진은 현종이 몽진하는 시간을 벌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충신 중의 충신으로 후에 현종은 하공진을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郎)에 추증했고, 영정을 그려 제사지냈으며, 진주성에 추모비도 세워줄 만큼 대우해 주었습니다.

 

2-5.애전 전투에서 거란 본진과의 최후의 사투를 벌인 양규와 김숙흥

 

한편 통주, 귀주 등지를 확보하여 적진 후방을 위협하고 있었던 양규 휘하의 고려군은 퇴각하는 거란군을 그냥 보내줄 생각이 없었기에 번개처럼 기습하여 적에게 섬멸적인 대 타격을 가하였습니다. 적병 10,000명을 격살한 귀주 별장 김숙흥의 대 전과를 필두로 양규의 의주 지방 "무노대 전투"에서는 적 사살 2,000명, 포로 3,000명, 이수 "석령의 추격전"에서 적 사살 2,500명, 탈환인 1,000명, "여리참 전투"에서 사살 1,000명, 탈환 1,000명, 마지막 혈전인 "애전 전투"에서 사살 1,000여명의 전과를 올렸습니다. 전과를 보면 양규와 김숙흥은 단순히 거란군의 섬멸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고려인 포로의 구출을 함께 노렸음을 알 수 있는데 이 시기 그들의 거의 모든 전과에는 항상 포로 구출이 들어있었고, 양규와 김숙흥이 구출한 포로는 물경 30,000명에 달하였습니다. 1011년 1월 28일, 양규와 김숙흥은 애전(艾田)에 거란군 한 부대가 접근한다는 정보를 받았습니다. 공교롭게도 지명이 '쑥 애'에 '밭 전'이라서 '쑥밭'이라는 의미였는데 오늘날의 위치는 정확하지 않지만 김정호의 동여도에 의하면 평안북도 영변군과 곽산군 북쪽에 '애전현'이라는 고개가 있다고 합니다.양규와 김숙흥은 이 애전에서도 거란 부대를 요격해 1,000여 명의 목을 베었지만 곧 거란주가 직접 이끄는 거란군 본대가 나타나고 맙니다.대거란 제국 황제의 친위군이었던 만큼 꽤 많은 정예 병력이 양규 부대를 포위했고 양규와 김숙흥은 애전 전투에서 성종의 친위군을 상대로 화살이 떨어지고 병사들이 다 쓰러질 때까지 처절하게 격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이었고, 결국 힘이 다한 양규와 김숙흥 이하 고려군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했습니다.

 

양규의 최후 분전은 철수하는 거란군에게 최대한 타격을 입히려고 한 것과 동시에, 구출한 고려 백성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싸움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단 수천 명의 병력으로 곽주를 탈환하여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후방을 교란하여 40만에 달하는 대군을 후퇴시켰으며, 수많은 전투에서 적군을 격살하는 동시에 3만에 달하는 포로를 구출해낸 양규의 공적은 세계 전쟁사에 기록될 엄청난 전공인데 전근대 사람의 노동력이 가장 중요하던 시기를 생각해보면 양규는 고려가 제3차 침공에 대비할 수 있는 기반마저 마련해 준 것이었습니다. 잡혀갔다가 풀려난 백성들은 군사로 징집되거나 군량미 등을 보충해 줄 수 있었으며, 고려는 양규와 김숙흥의 분전 덕분에 대 거란 외교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이들은 거란 역사상 최고의 명군으로 불렸던 성종 야율융서에게 굴욕감을 주었는데 명색이 황제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왔는데 항복을 받아내기는커녕 양규의 게릴라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후방이 포위되는 위기까지 맞았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존심 상 그냥 물러날 수 없으니 입조를 수락하는 모양새를 취하며 허겁지겁 물러났다는 것입니다. 거란 입장에서 양규를 무시해 버리면 보급로가 차단될 수밖에 없었고 도망갔던 고려 귀족들이나 문신들, 무신들, 병사들이 갑자기 역공을 가할 수도 있었습니다. 고려의 주전파들이 도망을 갔다고는 하나 현종은 여전히 무사했고 거기에 양규가 아직 배후를 찌르고 있다는 사실까지 알려지면 고려의 신민 모두가 들고 일어날 것은 불 보듯 자명했기에 한반도 지리를 잘 모르던 성종과 거란군은 그야말로 사면초가 신세에 잘못하면 목숨까지 잃어버릴 수 있는 판국이었습니다.

 

양규와 김숙흥의 부대는 정예군과 싸우다가 전멸하고 말았지만 거란군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큰 비까지 내려서 군마와 낙타가 쇠약해지고 무기가 상했으며 게다가 겨우 국경인 압록강 일대에 이르렀으나 양규의 임지였던 흥화진의 수비대장 정성이 흥화진에서 군사를 이끌고 뛰쳐나와 거란군이 반쯤 압록강을 건널 때 그 후위를 습격했는데 정성의 이 공격으로 물에 빠져 죽은 거란군이 매우 많았다고 합니다.

 

거란이 또 크게 군사를 일으켜 치니 순(현종)이 여진을 이끌고 군사를 합하여 막았다. 거란이 크게 패하여 장족(귀족을 지칭)과 병졸, 수레도 돌아온 것이 드물었다. 관속들도 태반이나 전몰했으므로 유계에 영을 내려 벼슬을 구하던 자와 조금이나마 글을 아는 자를 뽑아 그 결원을 보충했다.

속자치통감장편》 권 74

 

대중상부 3년(1010년) 11월 현종은 지채문의 활약으로 큰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으며, 현종을 호종한 지채문과 채충순은 공신이 되었는데 다른 대부분의 관료들은 다 도망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거란의 병사들 역시 몇 차례에 걸친 전면전으로 인하여 피로가 매우 누적된 상태였고, 양규, 김숙흥 등의 게릴라 전술에 말려들어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특히, 하공진이 전라도 남쪽에도 고려 땅이 수천리는 더 있어 현종이 얼마든지 더 멀리 도망갈 수 있다며 속여 결국 거란군이 물러나게 한 것은 하이라이트 중 한 장면으로 전쟁이 끝난 후 양규는 그가 행한 대 활약에 걸맞는 국가유공자의 대우를 받았습니다. 현종은 양규를 공부상서로 추증했고, 양규의 아내 홍씨에게 직접 조서를 썼을 만큼 예우했는데 원래 천자의 조서는 임금이 대략 내용만 지시하고 실제 글을 쓰는 신하(한림학사)가 따로 있었지만 양규의 활약을 기리기 위해 현종이 직접 글을 썼습니다. 현종은 이외에도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을 행할 때나 공신을 치하할 때 직접 문서를 작성했는데, 현화사 비문이나 당시 기록으로도 현종은 자애롭고 글씨를 잘 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양규의 업적은 두 가지 모두에 해당되니 고려사에서도 직접 현종이 작성했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조서의 내용은 죽을 때까지 양규에게 매년 쌀 100섬을 지급하게 했으며 양규의 아들인 양대춘에게는 교서랑(校書郞) 벼슬을 내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조선시대 수신전의 기원이 되는 '구분전'입니다. 한편 양규와 함께 전사한 김숙흥을 장군으로 추증했고, 그 어머니에게는 매년 쌀 50섬을 지급하도록 했습니다. 고려거란전쟁이 완전히 끝난 현종 10년(1019)에 현종은 양규와 김숙흥을 공신으로 삼았고, 1024년에는 '삼한후벽상공신'이라는 공신호를 추증했는데'삼한벽상공신'은 태조 왕건이 건국공신들에게 내려준 공신호이니 건국공신과 다름없는 공신이라는 의미인 셈이었습니다. 뒷날 고려 최전성기의 명군이었던 문종(제11대)은 두 영웅의 초상화를 공신각에 봉안하게 했으며 양규의 아들 양대춘은 이후 크게 출세해서 안북대도호부사를 거쳐 재상까지 지냈습니다. 임금과 신하들의 신뢰가 두터웠다는 평을 받았지만, 사실 양대춘이 활약할 무렵에는 고려도 평화기에 접어들어서 장수로서 활약할 기회는 없었다고 합니다. 어찌되었든 거란의 2차 침공은 수도가 함락되는 상황속에서도 위기를 극복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로인한 엄청난 피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논어(論語)에서 이르기를, ‘백성이 풍족하지 못한데 임금이 어찌 풍족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최근 전쟁 때문에 백성들이 농사일을 잃고 길가에 굶어죽은 시체가 너무나 많으므로, 백성의 이와 같은 형편을 생각하니 어찌 내가 홀로 편안할 수 있겠는가? 상식대관(尙食大官)에게 명하여 반찬수를 줄이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 왕이 수라상의 반찬을 줄이게 하다

고려사 현종(顯宗) 3년(1012년) 2월 17일(음) 을묘(乙卯))

 

하지만 현종은 그런 상황속에서도 백성들과 고통을 함께하겠다 하여 수라상의 반찬을 줄이는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고려 역사상 건국 이후 최초로 수도가 함락되는 최악의 위기를 극복하면서 고려는 점차 피해를 수습함에 따라 힘을 회복하기 시작하였고, 허수아비 젊은 왕이었던 현종은 진정한 고려의 군주로서 본격적으로 통치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지만 현종과 고려의 앞에는 아직도 마지막 시련이 남아있었습니다.

 

3.전쟁 수습 중 일어난 김훈·최질의 난 진압

 

2차 고려거란여요전쟁이 끝난 이후 현종은 다가올 거란과의 일전에 대비해서 군사력을 키우고 나라를 정상화 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게 되지만 현종의 치세 때 또 하나의 중차대한 반란이 일어나게 되니, 바로 거란의 제3차 침공을 대비하던중에 일어났던 김훈·최질의 난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 반란은 정말 상식 밖의 상황에서 벌어졌는데 제2차 거란의 침입 이후 국토가 황폐해지고, 거란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서 군사력을 키우는 과정 중, 국가에서 관료들에게 지급해야할 전시과에서 그만 문제가 생기면서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하게 됩니다. 우선 반란의 핵심 주모자인 김훈과 최질은 2차 고려거란전쟁(1010년) 때 공을 세워 상장군에 오른 고위 무관들로, 김훈은 강조의 통주 전투에서의 대패 이후 진격하던 거란군을 상대로 완항령에서 같은 좌우기군 장군인 김계부, 이원, 신녕한과 더불어 기습공격을 하여 거란군을 잠시 퇴각시킨 바 있는 인물이었고, 최질은 통주에서 중랑장으로 있던 중 포로가 되었다가 통주에 항복을 권유하러 온 행영도통판관 노전과 그와 함께 온 합문사 마수를 홍숙과 함께 억류한 뒤 항전을 주장하여 같이 있던 방어사 이원구, 부사 최탁, 대장군 채온겸, 판관 시거운과 함께 성문을 닫고 굳건히 지킨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최질은 공을 세웠음에도 문관직을 얻지 못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이 와중에 중추원의 일직인 황보유의와 중추원사 장연우가 경군의 영업전을 뺏어서 백관의 녹봉을 충당하려고 했던 것에 반발하여 결국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즉, 반란이 일어난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은 당시 중앙 군대인 경군의 영업전을 황보유의를 비롯한 문신들이 자기들의 전시과(녹봉)로 돌려버리는 몰상식한 짓을 통해 해결하려 했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때문에 거란의 2차 침입 때 목숨을 바쳐가며 싸운 무신들은 졸지에 큰 빅엿을 먹은 셈이 되었고, 여기에 중앙 군대의 구성원들까지 모두 손가락을 빨게 만들어버렸습니다. 특히나 주요 인물인 최질과 김훈은 2차 침임 때 공을 세워서 최고 관직인 상장군까지 올라간 최상급 무신들로이게 현종 재위 초기인 1년차(1010년)의 일로 그러니까 반란 4년 전의 일이었습니다.이로부터 불과 2년 뒤에 요나라의 성종은 강동 6주를 무력으로 탈환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하였으며 이미 거란의 2차 침공이 끝난 직후부터 거란과의 산발적인 충돌과 전투들을 계속 벌이던 중이었습니다.또한 이러한 사태가 벌어지는 동안 현종 본인의 실책도 크게 발생하는데 황보유의와 장연우가 무신들의 영업전을 뺏어서 문관들의 녹봉을 충당하는 최악의 삽질을 거하게 하고 있을때 안타깝게도 현종 또한 이들의 삽질을 제지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어서 반란이 일어날때까지 무려 4년 동안이나 사태를 방치하는 크나큰 실책을 저지르고 맙니다.이런 비정상적인 조치는 군대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딱 좋은 어리석은 짓이었고 사실상 전시중임에도 월급이 전혀 안나와서 뿔이 크게 난 최질과 김훈이 주도하는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이들은 현종에게 위협이 담긴 호소로 자신들의 월급을 모두 빼앗아간 문신들을 귀양보내고 일종의 무신정권을 세웁니다.

 

또한 무신들은 영업전의 반환은 물론 6품 이상의 모든 무관들에게 문관직을 겸하도록 현종에게 요구했으며 현종은 살기등등한 이들의 협박에 무신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줬습니다. 이 덕분에 김훈과 최질은 무관이 문관을 겸하게 만드는 한편 어사대(御史臺)와 삼사(三司)를 각각 금오대(金吾臺)와 도정서(都正署)로 바꿔버리면서 권력까지 모두 장악하게 되었지만 몇 달 안가 현종이 전 화주방어사였던 이자림이 올린 계책에 따라 1015년 음력 3월, 무신들을 모두 서경의 장락궁에 초청해서 연회를 베푼 사이 반란 주동자인 김훈, 최질 등 술에 취한 장군들 19명을 모조리 죽이고, 나머지는 모두 항복하면서 고려사 최초의 무신정변은 싱겁게 끝나게 됩니다.사실상 고려 최초의 무신정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너무나도 허무한 결말 때문인지 이상하게도 비중이 적은 사건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런 큰 실책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그래도 현종은 나름 뒷수습은 잘 했는데 주살한 19명 이외에 가족들은 한 명도 처형하지 않았고, 아들과 동복 형제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내 이후 등용문을 막아버리는 선에서 마무리했습니다.

 

이는 군인들의 공을 인정하고 무신에 대한 대우를 격상하는 것은 그대로 밀고 나가더라도, 그들이 무력으로 왕(현종)의 권위에 도전을 한 것은 사실이기에 그들을 처벌하여 앞으로의 폐단을 막는 일도 왕조 시절 임금으로서 겸했던 것입니다. 이는 직전에 바로 전대 국왕이었던 목종이 결국 시해당한 강조의 정변까지 현종이 직접 겪어봤던 것을 생각해보면 필요한 선에서 반란의 주모자들과 그 주변 관련자들에게 정말로 관대한 처벌을 내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후 현종은 무관에 대한 예우도 개선하여 전몰자에 대한 예우를 높여주고, 거란과의 전쟁 중 전사자에 대한 보상도 늘렸으며 군공자는 병사들까지 10,000여명 씩 포상을 줬는데 이게 별 것 아닌 조치 혹은 당연한 조치 같지만 당시 고려의 재정 문제나 관등의 인플레 등 여러 상황을 감안하면 리스크도 꽤 클 수 밖에 없는 대대적인 조치였습니다.당연하겠지만 현종은 요나라와 큰 전쟁을 벌여야 했고, 전쟁중인 상황에서 군인들의 월급을 죄다 횡령하고 나쁜 대우를 해주면 당장 칼과 창이 어느 방향을 향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해당 조치의 리스크가 큰 것은 사실이었지만, 저런 조치를 안취했을 경우엔 오히려 2차 무신반란의 가능성마저 생길 수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조치였습니다.

 

 

3-1. 동여진 해적 방어

 

현종은 거란 뿐 아니라 여진과의 전쟁에서도 고려를 지켜야 했는데 거란이 육지로 침략했다면 여진은 바다를 통해 고려를 침략했는데 이들은 동여진의 포로모타부(蒲盧毛朶部)로 포시에트만에 있는 발해의 항구를 이용하여 고려의 동해안을 침략하였습니다. 특히 동여진 해적의 동해안 침략은 이미 목종대부터 시작되었는데 1005년(목종 8) 동여진이 등주(登州) 부락(部落) 30여 곳을 불태우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후 등주를 비롯한 동해안 북부지역의 해안선을 따라 성을 쌓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바다를 통해 침략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목종은 동여진의 등주 침략 이후 동여진 해적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한 성을 축조하였습니다.

 

1①(목종) 8년(1005)에 진명현(鎭溟縣)에 성을 쌓았다. 510칸이고, 문(門)은 5개이다.

②금양현(金壤縣)에 성을 쌓았다. 768칸이고, 문(門)은 6개이다.

③곽주(郭州)에 성을 쌓았다. 787칸이고, 문(門)은 8개, 수구(水口)는 1개, 성두(城頭)는 5개, 차성(遮城)은 2개이다.

④(목종) 9년(1006)에 용진진(龍津鎭)에 성을 쌓았다. 501칸이고, 문(門)은 6개이다.

⑤구주(龜州)에 성을 쌓았다. 1507칸이고, 문(門)은 9개, 수구(水口)는 1개, 성두(城頭)는 41개, 차성(遮城)은 5개, 중성(重城)은 168칸이다.

⑥ (목종) 10년(1007)에 흥화진(興化鎭)과 울진(蔚珍)에 성을 쌓았다. 또 익령현(翼嶺縣)에 성을 쌓았는데 348칸이고 문(門)은 4개이다.

⑦(목종) 11년(1008)에 통주(通州)에 성을 쌓았다. 등주(登州)에 성을 쌓았는데 602칸이고, 문(門)은 14개, 수구(水口)는 2개이다.

고려사 권82 병지(兵志) -성보-(城堡)의 기록

 

이러한 동여진 해적의 침략은 현종대에 이르러 구체화 되었는데 현종은 즉위년(1009)에 과선(戈船) 75척을 만들어 진명현의 입구에 정박시켜 동북의 해적을 방어하게 하였지만 이내 곧 거란의 2차 침입이 시작되면서 동여진 해적에 대해 신경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결국 거란과의 혈전이 한창 중이던 현종 2년(1011) 8월, 동여진 해적이 100척의 함선을 이끌고 경주를 침략하였고 다음해인 현종 3년(1012) 다시 동여진 해적이 청하현(淸河縣)·영일현(迎日縣)·장기현(長鬐縣)등 동해안을 침략하였습니다. 청하현·영일현·장기현에 대한 동여진 해적의 침략은 고려군이 막아냈지만, 거란과의 전쟁 이후 계속되는 동여진 해적의 침략은 현종의 성보 축조로 이어졌습니다. 현종은 동여진 해적이 100척의 함선을 이끌고 경주를 침략하자, 같은 달 청하(淸河)·흥해(興海)·영일(迎日)·울주(蔚州)·장기(長鬐)에 성을 쌓았다. 동해안 북부에 집중적으로 축성하였던 목종과 달리 현종은 동해안 남부에 축성하였는데 이는 그만큼 동여진 해적이 남부 동해안까지 위협적으로 침략했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또한 당시 개경·서경과 함께 고려의 3경(三京) 중 하나였던 신라의 옛 수도 경주가 침략당한 만큼 고려는 동여진 해적에 대한 방비에 신경을 써야 했을 것입니다. 이에 현종은 대대적으로 수군(水軍)을 양성하고, 이를 지휘할 도부서(都部署)를 설치하였는데 도부서는 동계의 진명도부서(鎭溟都部署)·원흥도부서(元興都部署)와 북계의 통주도부서(通州都府署)·압강도부서(鴨江都部署), 그리고 동남해를 관할했던 동남해도부서(東南海都部署)가 있었습니다.

 

즉위한 해에 바로 75척의 함대를 동원할 수 있었던 이유도 목종 대부터 동여진 해적을 방어하기 위한 축성과 함께 수군이 있었기 때문으로 현종은 수군을 계속 증강시켰고, 그 규모는 현종 10년에 이르러 무려 수백 척에 이르렀습니다. 일본측의 기록인 소우기(小右記)에는 고려의 군함이 매우 거대하여 해적선을 전복시켰고, 그 안에는 온갗 무기들이 가득하였다고 합니다.이러한 고려의 대응으로 더 이상 동해안을 침략할 수 없었던 동여진 해적은 우산국과 일본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동여진 해적에 대한 고려의 방비가 효과를 보았던 방증으로 그 결과 우산국은 여진족 해적에 의해 초토화되어 많은 우산국인들이 고려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우산국의 피해는 150여년이 지난 의종대까지 복구되지 못하였습니다. 의종 11년(1157) 김유립을 보내 울릉도의 거주 가능성을 조사하게 하였으며 이에 김유립은 촌락의 흔적이 있지만 사람이 살수 없다고 보고하였으며 또한 동여진 해적은 일본의 쓰시마 섬(對馬島), 이키 섬(壹崎島)을 비롯한 규슈(九州)의 북부지역과 하카타 만(博多灣)을 공격하였고 이후 한반도 남해안으로 도주하였는데 일본측 기록에 해적선들이 섬에 숨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기록에 나온 이 섬들이 동해안의 울릉도인지, 남해안의 다도해인지 주장이 엇갈립니다. 현종 10년(1019) 해적선 8척을 포획하여 일본인 259명을 구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1012년 경주 공격에 실패하였던 동여진 해적이 세력을 재정비한 이후 감행하였던 것이었습니다.

 

3-2.장인 감축과 농업 장려

 

○교서를 내려 이르기를,

“홍범(洪範)」의 팔정(八政)에서는 먹는 것을 최우선으로 꼽았으니, 이것이 진실로 부국강병을 위한 도(道)이기 때문이다. 근자에는 사람들의 습속이 가볍고 사치스러워져서 본업을 버리고 말단만을 좇아 농사짓는 법을 알지 못한다. 여러 도의 금기방(錦綺坊)·잡직방(雜織坊)·갑방(甲坊)의 장인[匠手]들은 모두 선별하여 감축하고 이들로써 농업에 나아가게 하라.”라고 하였다. - 각 도의 장인의 수를 감축하여 농업에 종사하게 하다

고려사절요 현종(顯宗) 3년(1012년) 3월 미상(음)

 

현종(顯宗) 3년(1012) 3월 하교(下敎)하기를,

“홍범(洪範) 8정(政)은 먹는 것을 우선으로 삼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부국강병(富國强兵)의 도(道)이기 때문이다. 근래 인습(人習)이 경박하고 사치스러워져서 본업(本業)를 버리고 말업(末業)을 좇아 농사에 대해 알지 못하니 여러 도(道)의 금기방(錦綺坊)·잡직방(雜織坊)·갑방(甲坊) 장인들을 모두 조사해 인원을 감축하고 농업에 종사시키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 농상의 장려를 하교하다

고려사 현종(顯宗) 3년(1012년) 3월 미상(음)

 

현종은 또한 거란의 2차 침공 이후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위해서는 농업이 우선이라 판단하여 여러 수공업 장인들을 감축하고 감축된 장인들을 모두 농업에 종사시키도록 하였는데 현대의 기준으로는 잘 이해가 안되는 조치로 보이기도 하지만 당대 현종은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최우선이라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3-3.고려 군현제의 확립

 

고려 6대 왕 성종은 고려 초기를 대표하는 명군 중 1인으로, 고려의 향직 제도를 개편하고 최초로 지방관을 파견하여 난립하는 호족 세력을 견제했던 유능한 군주였습니다. 이러한 성종의 지방 정책을 이어 나간 현종은 그 혼란스러웠던 거란과의 전쟁 와중에 내치에서도 매우 괄목할 만한 치적들을 남겼는데, 그중 가장 손에 꼽는 것이 바로 이 무렵까지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던 고려의 행정망을 완벽하게 구축한 것입니다. 고려 건국 100주년이 되는 1018년(현종 9년) 전국에 4도호부·8목·56지주군사·28진장·20현령을 두어 지방 호족 세력을 억누르고 임금의 권한을 강화시킨 후 드디어 체계적인 군현제를 확립하였습니다. 성종 시기 12목을 설치하면서 파견했던 12명의 지방관 수가 이때에 이르러 116명까지 확대되었으니, 이는 곧 고려 지방 제도의 완성이었습니다. 화합과 관용의 정신을 무엇보다 우선으로 여겼던 현종은 각 군현 호장(戶長) 등을 비롯한 향리들의 정원(定員)을 규정하고, 공복(公服)을 제정하였으며, 억눌린 호족 세력을 어르기 위한 유화 정책으로써 그 자제들에게 과거(科擧) 응시의 자격을 부여하였습니다.

 

1022년에는 지방 향리 세력에 대한 호칭을 전면 개정하면서 왕권을 바탕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정치 체제를 완성하게 됩니다.고려거란전쟁이라는 기나긴 전쟁을 극복하면서, 현종은 그 와중에 정치 세력들을 잘 다스리고, 쿠데타를 극복하고, 고려 시대의 본격적인 지방 제도를 정비합니다.현종은 지방제도 정비하고, 관리들을 보내고, 정치세력을 수합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자기의 치세에, 그리고 전쟁 중에 해냅니다.이렇게 함으로써 5도 양계 체제(五道兩界體制), 즉 경(京) - 목(牧) - 도호(都護) - 군(郡) - 현(縣) = 진(鎭)이라는 군현제의 기본 골격이 완비되었습니다.

 

3-4.3차 고려거란전쟁과 금교역 전투 승리

 

민관시랑(民官侍郞) 곽원(郭元)을 송(宋)에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거란(契丹)이 해마다 침략한다고 알렸다. 표문(表文)을 보내 말하기를,

“성스러운 위세를 빌어 지혜로운 계략을 보이고자 하므로, 혹시 위험한 때에 이를지 모르니 미리 위급한 상황을 구제하는 은혜를 베풀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 송에 구원을 청하는 사신을 보내다

고려사 현종(顯宗) 6년(1015년) 미상(음))

 

거란의 2차 침입 이후에도 고려는 계속해서 북송과 비밀리에 통교하였으며, 특히 1015년 북송에 사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북송은 고려가 오래도록 조공하지 않았다는 핑계로 냉담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결국 고려는 북송의 지원 없이 거란의 재침공에 혼자서 대응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였고 그렇게 1018년(현종 9년) 거란의 동평왕(東平王) 소배압이 황실 최정예 기병으로 이루어진 10만의 대군을 앞세워 다시금 고려를 침공했지만 이제는 민심을 어루만지고 왕권을 튼튼히 하면서 고려의 진정한 지도자로 거듭난 현종과 강감찬을 필두로한 고려군이 거란을 상대할 만반의 준비를 끝마친 상황이었습니다. 다만 현종 본인도 의도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는데, 강감찬을 사령관으로 하는 주력군을 모두 북쪽으로 보내 거란군을 막으려고 했으나 적장 소배압은 고려군의 공격을 감수하면서 그대로 진격하여 개경 100여리 밖까지 접근해온 것이었습니다. 당시 거란 장수 소배압이 이런 작전을 펼친 이유는 고려군 주력이 전부 북방에 있었기 때문으로 유목기병 특유의 기동력을 이용해 북방에 배치된 고려군 주력을 따돌리고 2차 칩입 때처럼 개경을 공격해서 현종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소배압의 의도였던 것입니다.

 

흥화진 전투 이후 소배압은 전략적인 기세를 잃지 않고 개경을 향해 바로 공격해 들어갔는데 이는 거란군이 기병을 토대로 한 뛰어난 기동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전방 고려군의 총 지휘를 맡은 강감찬은 이곳 저곳에 배치해둔 별동대를 계속 보내 거란군(요)의 머리, 허리, 꼬리를 정신없이 찔러대기 시작하였습니다. 자주(慈州) 내구산 전투에서 부원수 강민첨의 부대가 거란군의 한 부대를 잡아 격파했고, 평양 근처 마탄진에서는 시랑 조원(趙元)도 거란군 한 부대를 격파하는 등 연달아 피해를 입혔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마탄진 전투에서 거란군 10,000여 명을 참획(斬獲, 베거나 사로잡음)했다고 합니다.

 

(1019년) 봄 정월 경신일에 강감찬이 거란 군사가 서울에 가까이 오므로 병마판관 김종현(金宗鉉)을 보내어 군사 10,000명을 거느리고 걸음을 배로 늘려 서울에 들어와 방위하고, 동북면 병마사 역시 군사 3,300명을 보내 들어와 구원하였다.

고려사

 

고려군은 또한 동북면의 병사 3,300명을 개경으로 이동시켜 개경의 수비를 보충했는데 동북면(현재의 함경남도) 병사 1명이라면 타 도의 병사 5명 ~ 6명에 맞먹을 정도로 최정예 병력이었습니다. 함경도 병사의 이러한 최정예 전통은 조선 시대에도 이어지는데 이는 동북면 쪽에 수렵을 하는 사냥꾼들이 많았다는 것에 기인할 것입니다. 당시 호랑이나 늑대와 같은 맹수들을 상대해야 했던 사냥꾼들은 최정예 병력의 자질을 모두 가졌으며 또한 고려시대든 조선시대든 해당 지역은 수시로 소규모 교전이 발발했고, 군대에서 실전경험만큼 병력의 질을 높이는 훈련은 없는데 그 실전경험이 풍부한 병력들이 동북면 병사들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해당 지역은 체격이 좋은 북방 유목민족이 사실상 공존하는 지역이다 보니 근대 신장조사에서도 다른 한반도 지역보다 평균신장이 클 정도로 체격요건도 좋았습니다. 현대에도 마찬가지지만 개개인의 신체스펙이 현대전 이상으로 크게 영향을 미치는 냉병기 시대의 전장상황을 생각하면 다른 지역의 병력 따위와 비교하기가 힘든 수준이었을 것입니다. 특히 김종현이 이끄는 10,000명의 병력은 소배압을 맹추격하여 소배압의 주력을 끊임없이 견제 위협하였습니다.

 

3-5.현종의 의지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은 강감찬과 양규는 물론 고려의 세종대왕이었던 현종도 재조명하고 있다

 

소배압은 2차 고려거란전쟁 때처럼 수도 개경만 불태우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기에 결국 개경 근처의 신은현(新恩縣)까지 도착했는데 사실 이것이 어리석은 선택은 아닌 게 요동 방어선을 우회한 거란에게 발해가, 병자호란 때의 청나라군에게 조선이 각각 이렇게 패배를 당한 예가 있었습니다. 삼국지의 촉한도 등애의 산을 통한 우회기동에 무너졌고, 프랑스도 나치 독일에게 이런 방법으로 점령당했습니다. 때문에 소배압이 그렇게 수많은 방해를 뿌리치고 수백 km를 주파하여 전략적 목표인 개경까지 도착한 것도 대단한 일로 이런 경우, 왕조국가에서 다음 선택은 왕의 도주였습니다. 병자호란때도 임진왜란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려시대에도 공민왕의 경우 왜적이 쳐들어 올 때마다 개경을 비우고 도주했는데 사실 이건 왕조 국가에선 어쩔 수 없는 면도 있습니다. 왕이 곧, 국가이기 때문입니다.하지만 현종은 도주하지 않았습니다. 적의 주력군이 개경으로 접근하고 있는 상황에서 적군에 맞서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소배압과 거란군은 난감해졌습니다. 전쟁에서의 승패는 지휘관이 패배를 인정하는 순간 결정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전쟁도 인간이 하는 것인지라 결국 의지의 싸움이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인데 이 의지의 싸움에서 현종이 소배압을 이겨 버린 것이었습니다.

 

EBS 다큐프라임 한국사 오천년, 생존의 길 제2부 -거란전쟁, 동북아 균형자의 조건

신유일(辛酉日)에 소손녕(蕭遜寧)이 신은현(新恩縣)에 이르렀는데, 경성에서 100리 떨어진 곳이었다. 왕이 명하여 성밖의 민호(民戶)를 거두어 성안으로 들어와 청야(淸野, 적에게 이로움을 주지 않도록 들판을 치움)하고 기다리게 하였는데, 소손녕이 야율호덕(耶律好德)을 보내어, 서찰을 가지고 통덕문(通德門)에 이르러 회군(回軍)하겠다고 알리고는 몰래 후기(候騎) 300여 명을 보내 금교역(金郊驛)에 이르렀는데, 왕이 군사 100명을 보내어 밤을 틈타 기습해서 그들을 죽였다.

고려사절요 1019년 1월 3일

 

그러나 고려 현종은 2차 고려거란전쟁 당시 개경이 불타버렸던 아픈 기억을 바탕으로 방어를 위한 작계를 완비하고 있었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엄청나게 보강된 개경의 성문과 성벽, 그리고 개경의 본성을 철통같이 엄호하는 송악산의 산성이었습니다. 송악산 산성 또한 2차 침공 이후에 거란의 재침을 대비해 만든 요새였으며 그 외엔 마치 포격이라도 맞은 듯 쌀 한 톨 집 한 채 없는 폐허, 그리고 쉴새없이 사방에서 찔러대는 고려군의 견제 병력들뿐이었습니다. 청야전술에 군량 보충이 막히고, 젊은 임금이 수도에서 결사 항전하니 군대와 백성들의 사기가 올랐으니 거란군으로서는 그야말로 최악의 난관에 봉착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소배압은 꾀를 내어 수하 장수인 야율호덕을 시켜 개경의 통덕문으로 가서 개경을 수비하고 있었던 고려군에게 "이제 우리 철수합니다."하고 거젓밀을 쳤는데 그렇게 뻥을 쳐서 안심시킨 후에 몰래 척후병 300명을 보내 개경에 잠입시켰습니다. 즉, 개경의 방비를 소홀히하게 한 뒤 척후병을 잠입시켜 성문을 몰래 열어서 쳐들어가려는 작전을 짠 것이지만 거란군 입장에서는 불행하게도 이 회심의 작전마저 고려군에게 간파되어 버렸고, 개경의 성문을 열기 위해 잠입시킨 척후병 300명은 개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금교역(황해도 금천군)에서 고려군 100명에게 붙잡혀 죽었습니다.

 

이것은 현종이 군사를 쓸 줄 알았다는 것으로 기병은 돌격과 공격에도 자주 사용하지만 제일 효과를 발휘하는 것은 바로 기습인데 기병이 야간이든 아니든 기병의 기동력으로 기습해 적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과거 유목국가들이 자주 쓰던 방식이며, 역대 중국 국가도 여러모로 골치를 앓은 적이 있었습니다. 당장 한나라 당시에도 흉노의 약탈에 힘들게 쌓은 장성도 무용지물이었습니다.이는 사실 무시무시한 기록인데 상식적으로 적을 상대하기 위해 더 많은 병력을 보내는 것이 최선이며, 개경의 병력이 충분하다는 것을 거란군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더욱 그럴 필요가 있었습니다. 상대적으로 군사수가 부족한 쪽에서 별동대를 움직일 때는, 소위 말하는 뻥카를 위해서라도 별동대의 규모를 키워놔야 상대가 수적 우위를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이렇게 300명 잡는 곳에 100명을 보낸다는 것은, 100명이 300명에게 이기느냐 지느냐를 떠나서 고려 측 병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자인하는 행위로, 전략적인 불리함을 초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굳이 적보다 적은 병력'을 내보낼 이유가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만큼 당시 개경의 수비 병력이 부족했다는 의미입니다.

 

훗날 이성계에 의한 위화도 회군(1388)을 보면 당시의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는데 전 병력을 전방으로 보낸 고려의 개경 수비병은 아무리 높게 잡아도 몇 천 명이 채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안시성 전투, 귀주성 전투, 진주대첩, 행주대첩이 이와 유사한 상황으로 만약 고려의 이 정예 100명이 오히려 거란군에게 당했다면 소배압도 결전을 택할 수도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현종으로서도 엄청난 도박을 했던 셈입니다. 300명 상대로 100명을 보내는 것 자체도 전략적 손해인데, 그 100명이 패배하기라도 하면 그대로 끝장이 나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 100명은 일반 병사가 아닌 현종의 근위대에서 차출한 정예 중 정예인 병력으로 봄이 바람직합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거란군의 정황을 포착해 내고 기민하게 대처한 개경의 고려군 지휘부의 능력에 찬사를 보낼 만하며 당시 개경 고려군의 총사령관이었던 현종의 군사적 능력과 대담함, 용기에도 고평가를 줄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배압의 군대는 북방에서 입은 타격도 컸던 데다가 보급선마저 단절된 상태인데 개경의 방비 또한 철통 같으니 방위군과 추격군 사이에서 포위될 위험을 감지하여 결국 퇴각을 결정합니다.

 

이것만으로도 현종이 심리적인 전술로써 승리했다고 볼 수 있는데 개경에는 군사도 적었고, 무엇보다 산성이라기보다는 수도이면서 행정의 핵심인 평야성인지라 적에게 일단 포위당하면 병자호란의 남한산성 때와 마찬가지로 수비측이 더 고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소배압의 목적이 현종을 사로잡아 항복을 받아내는 것인데 오히려 현종은 목숨을 걸고 저항하며 "네가 죽든지 내가 죽든지 누가 이기나 끝장내 보자!"라는 식으로 강감찬이 보낸 추격 부대가 올 때까지 성 안의 백성들을 진정시키고 싸운 것입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국왕이 몽진하지 않고, 수도 개경에 남아서 항전을 택한다고 하니 백성들 입장에서는 용기백배하여 같이 싸우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한 나라의 수장이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 하니 백성들이 급하게 민병대를 만들었다고 해도 소배압의 요나라 정예군은 사기가 저하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거란군 자신들은 속전속결로 끝내려고 왔지만, 그들을 맞이한 것은 오히려 투지를 불태우는 현종과 고려 백성들의 항전 의지였고, 굳게 닫힌 개성 성문과 성벽뿐이었습니다. 당시 거란군이 퇴각하자 개경의 백성들이 크게 환호하면서 개경의 수호신에게 감사를 드렸다고 합니다.이렇게 현종은 금교역 전투에서 회심의 일격을 성공시켜 전술적 승리를 거둔 끝에 적들의 사기를 꺽었고, 결과적으로는 고려거란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3-6.강감찬의 귀주대첩

 

 

이후 강감찬 장군의 귀주 대첩은 이미 이긴 전쟁에서 적들을 몰살시켜 앞으로의 전쟁 가능성을 없애버린 포위섬멸전으로 물론 포위섬멸전이었지만 당대 최강의 기병 군단을 보유한 거란군을 상대로 벌인 대회전이었고, 전투의 변수가 고려에 불리하게 작용했다면 충분히 반대의 결과가 나올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가끔은 소수의 결정이 역사를 바꾼 때라든지, 역사의 방향을 결정할 때가 있는데 현종이 도망치지 않고 거기서 버텼다는 것을 그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소배압으로서도 전멸을 피하기 위해 나름 필사적인 선택을 하였으나 마침내 귀주에서 고려의 주력군을 만나게 되었고, 그 결과가 바로 귀주 대첩이었습니다. 귀주 대첩은 현종 10년(1019) 2월 1일에 있었고, 고려군의 대승리를 이끈 명장 강감찬의 개선 행렬은 1019년 2월 5일로 현종이 직접 영파역까지 나아가 맞이했는데 전하는 글에 의하면, 이때 현종이 임시로 지은 누각에 친히 올라 주연을 베풀며 강감찬의 손을 잡고 금으로 만든 8가지 꽃을 머리에 꽂아주고,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영파역을 '흥의역'으로 고쳐 부르도록 했으며 뿐만 아니라 현종은 강감찬을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 개국남(檢校太尉 門下侍郎 同內史門下平章事 天水縣 開國男) 식읍 300호' 에 봉하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 의 호를 내렸습니다. 강감찬에게 금꽃을 꽂아주는 현종 고려는 이렇게 승리의 기쁨을 누린 후 1년여간 3차 거란 침입에 대한 전후 복구 작업과 보훈 작업에 매진했습니다. 고려거란전쟁 승리후 고려는 요나라, 송나라와의 3강 체제가 확립되고 120년에 달하는 태평성대를 누리게 됩니다.

 

4.동북아시아의 균형자 현종

 

전쟁이 끝난 지 3개월 후인, 1019년 5월. 힘으로 고려를 굴복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란은, 평화협정을 위한 사신을 파견합니다. 세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한 적국이자, 불과 석 달전에 고려에 의해 주력군이 몰살당한 거란을 상대로 현종의 선택은 할아버지인 왕건(거란인과는 큰 원한이 없던 왕건은 거란의 사신을 잡아죽이기도 함)과는 달랐습니다. 현종 11년(1020) 2월에 현종은 이작인을 거란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거란에게 예전처럼 사대의 예를 다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대라고 해도 대승을 거둔 이후의 상황이니 당연히 발언권에서 고려가 힘을 낼 수 있는 상황이었고 말이 좋아 사대지, 거란의 입장에서는 고려의 화친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을 힘도 명분도 없었습니다. 제국의 최정예 부대가 귀주에서 대파되었기 때문에 이미 최강대국으로서의 체면을 구기게 되었고 이 전투로 인해 북송을 비롯한 여진도 거란을 향해서 으르렁거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거란의 형편상 내정을 안정시켜야 하는 문제가 우선시되었기에 고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며 전쟁에 승리한 현종이 도리어 거란에 형식적이나마 사대의 제스쳐를 취했던 것은 하루빨리 기나긴 전쟁을 종식시킴으로써 백성들이 더 이상 고통받지 않게 하기 위한 평화주의적 실리 외교로 평가됩니다.

 

현종이 주도적으로 전란 종식을 선포함으로써 거란을 물리쳤다는 사실을 북송에 당당히 어필할 수 있었고, 이는 곧 동북아 국제질서의 균형자라는 고려의 대외 위상 격상으로 이어졌습니다. 주도적인 외교를 통해 선진 문물을 받아들인 고려는 나라가 더욱 부강해졌음은 물론 북송과 암묵적으로 연대하여 거란이 함부로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국가가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이득을 챙긴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고려는 거란이 요구했던 강동 6주를 넘겨주지 않았고 현종이 거란에 입조를 하여 항복하지도 않았습니다. 또 북송과의 잠시 단교를 선언했지만 물밑에서 교류관계는 계속 유지했는데 북송도 고려에게 귀주 대첩에서의 승리에 대해서 찬사와 감사의 서신을 보내기도 했는데 요나라가 고려 원정에 실패함으로써 군사·경제적으로 침체 되었기 때문에 북송도 당분간은 편안하게 살 수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고려와 현종이 국제적으로도 엄청난 위신을 떨친 셈이었고 고려와 거란의 오랜 전쟁은 종결되었습니다. 이때 현종의 나이는 고작 27세였으니, 이후로도 거란이 고려에 대대적으로 군사를 이끌고 침략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것은 거란이 사실상 고려의 완전 병탄과 강동 6주 영토를 포기했다는 의미였습니다.

 

거란의 고려 1차 침공 당시 요나라는 고려를 완전 병탄할 의도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제스처가 미리 있었으면 2차 거란의 공격부터는 애초에 피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의문도 제기되는데 요나라의 입장에서는 사대까지는 아니라도 고려가 중립적 입장만 표현했어도 당면 상대인 북송을 버려두고 고려를 먼저 선제공격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의 주장이지만 앞서 언급했 듯 북송은 고려와 서로 1전어치의 군사적 도움도 주고받지 않았고 무엇보다 2차, 3차 침입 때의 요나라는 강동 6주 탈환이라는 목표가 분명 있었습니다. 고려 입장에서는 전쟁을 피하려면 전략적 요충지인 땅을 내주어야 한다는 무리수가 있었기에 당시 외교로 단순히 전쟁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은 쉽게 단정지을 수 없습니다.

 

속자치통감장편에서는 귀주 대전에서의 대패 이후, 거란이 고려를 두려워한다는 기록까지 등장하고 있는데

 

천성(天聖) 3년 거란이 일찍이 고려를 정벌하였습니다. (중략) 고려가 거란 병사 20만을 살해하여 한 필의 말과 한 척의 수레도 (거란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이때부터 거란이 (고려를) 항상 두려워하여 감히 공격하지 못했습니다. 조정이 만약 고려를 얻는다면 거란의 움직임을 기다리고 나서 도움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이 헤아리건대 거란이 반드시 고려가 후환이 될 것을 의심하여 끝내 감히 무리를 다하여 남하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이는 중국의 큰 이로움입니다.

속자치통감장편 권150 송 인종 경력 4년 6월 무오.

 

또한 귀주대첩 이후 전쟁이 끝나자 현종은 전후 피해 복구를 위해 노력하였는데 거란의 침공으로 백성들이 큰 피해를 입어서 곤궁해지자 양식과 종자를 지급하면서 전후 피해 복구에도 큰 노력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

 

현종(顯宗) 10년(1019) 4월 동주(洞州) 관내 수안(遂安), 곡주(谷州) 관내 상산(象山)과 협계(峽溪), 잠주(岑州) 관내 신은(新恩) 등 여러 현(縣)의 경우, 민(民)이 거란의 병사로 인해 곤궁해졌으므로 관청에서 양식과 종자를 지급하였다. - 거란의 침략에 피해를 입은 주현에 양식과 종자를 지급하다

고려사 현종(顯宗) 10년(1019년) 4월 미상(음)

 

4-1.서희,양규,강감찬도 아닌 고려거란전쟁의 진정한 종결자 현종

 

거란과의 전쟁에서 고려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발판이 된 금교역 전투를 승리로 이끈 군주 현종의 역할은 귀주 대첩으로 잘 알려진 6차 고려-거란 전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5차 전쟁이 마무리된 시점부터 6차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인 약 1년 간의 기간 동안 현종은 세 차례의 열병·열사를 시행하여 고려군을 전체적으로 점검하였으며, 강감찬을 중용하여 북방의 군권을 맡겼으며 전쟁 발발 이후에는 전방의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거란군이 고려 주력군을 피해 수도를 향해 진격하자 개경 주변을 청야하는 다소 극단적인 수비책을 사용하였습니다. 병력을 나누어 거란의 우회 기동에 대응한 강감찬의 전술과 수도 일대를 청야하여 거란의 전략을 맞받아친 현종의 전술은 모두 거란의 움직임을 조기에 읽고 전방과 후방 사이의 긴밀한 연락을 통해 이루어낸 성과라고 여겨집니다. 즉 귀주대첩은 단지 전방에서의 교전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 고려 후방에서의 정보전과 방어 전략이 유효하게 작동하는 가운데에서 거둔 성과라는 것입니다. 현종이 청야전술을 통해 개경 방어에 성공함으로써 고려는 거란의 전장주도권을 빼앗고, 퇴각하는 거란군을 유리한 전장으로 이끌어 낼 수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귀주대첩으로 대표되는 마지막 고려-거란 전쟁은 강감찬이라고하는 뛰어 난 지휘관의 역량으로 얻어낸 승리로 회자되지만 이를 면밀히 살펴보면 전방의 고려 군세와 별개로 후방에서의 지원이나 유기적인 작전 전개가 존재했음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전쟁 중반에 있었던 개경 방어전에는 청야전술을 결단한 현종의 역할이 주효하게 작용하였는데 소위 귀주대첩으로 회자되는 마지막 고려거란 전쟁은 강감찬이란 뛰어난 지휘관의 역량으로 얻어낸 승리였을 뿐 아니라, 전쟁의 전체적인 판세를 조망하며 완벽한 작전 전개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조치한 현종의 결단이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룬 결과였던 것입니다.

 

4-2.동북아 국제 질서의 재편

 

대거란 전쟁에서 승리한 고려로 인해, 아시아의 세계 질서는 재편되는데 거란을 제압한 고려에 대한 주변 국가들의 태도가 일단 달라졌는데 만주 지역의 철리국(鐵利國)이 사신을 보내 고려에 귀부하기를 원하는 표를 올렸고 연이어 탐라국이 공물을 바치고, 흑수말갈의 추장이 찾아오는등 고려는 주변 소국을 거느린 제국으로 성장해갔습니다. 고려는 스스로의 필요에 따라 송나라와 교류를 하고, 거란과도 교류를 하는 독자적인 세력이 된 것입니다.

 

2009년 11월 21일 <역사 스페셜> 中

전쟁이 수행되는 동안 고려에는 거란인들이 연속해서 내투來投해 오기도 하고 흑수말갈, 또 송의 상인들까지 고려에 헌물을 가지고 조빙했다. 동·서여진이 모두 고려에 귀부하여 방물을 바치고 사물賜物을 받아가기도 하고 거란에서 받은 직업을 고려에 바치고 고려에 귀부하는 무리도 있었다. 여진 제부족은 늘 주변 힘의 균형이 바뀔 때마다 민감하게 강한 쪽을 좇았던 사실을 고려하면, 고려가 실질상 승리를 거두면서 국제사회에서의 위상이 높아진 것을 반영한 움직임이었다.

육정임, "동북아역사논총 34호: 고려·거란 30년 전쟁과 동아시아 국제질서"2011

 

장장 26년을 걸쳐온 대전쟁이 종식된 후, 거란은 더 이상의 팽창 동력을 상실하여 송나라에 대한 침략은 고사하고 나라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반대로 고려는 중국 송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주변국들 사이에서 당대 최강 요나라를 꺾은 강대한 나라로 인정받게 되는데, 저 멀리 발해 북단에 위치했던 철리국, 불내국, 동흑수국으로 대표되는 동·북여진의 여러 나라들은 물론 탐라국과 우산국 외 일본 규슈 등지의 지방 세력들로부터 조공을 받았습니다. 이로써 동아시아 세계의 균형자로 거듭난 고려는 북방의 거란, 중원의 북송과 나란히 국제 질서의 한 축을 담당하는 주요국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심지어 현종의 삼남 문종대에 이르면 거란에 조공을 바쳐 왔던 서여진마저 고려에 귀부하였으니, 귀주대첩 이후 고려가 최전성기로 돌입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확실한 이익을 모두 취한 것입니다. 또한 전쟁 이후 고려는 거란과의 조공-책봉 관계를 복구하였는데 이는 양국이 대등한 관계로 변하거나 혹은 입장이 뒤바뀌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공국으로서 침략해 온 종주국을 방어하는 식이었기에 고려가 거란측으로부터 조공국으로서의 위상을 다시금 확보받고 거란에 사죄하는 식으로 양국간의 관계 회복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4-3.거란의 분열,대조영의 7세손 대연림의 발해부흥운동

 

다만 전쟁 승리를 바탕으로 높아진 고려의 국제적 위상이 반영되어 실질적으로 고려는 거란과 송을 등거리에 두는 외교관계를 추진했는데 해당 조공-책봉 관계는 명목적이였다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국익에 손해가 예상되는 거란의 요구는 고려가 당당히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속자치통감에 의하면 1014년에 현종이 거란의 2차 침입을 막은 이후 거란을 견제하기 위해 송나라에 연호를 요청하면서 송나라에게 황제 존호 사용에 대한 허락을 요청했습니다. 한편 현종은 요나라에 대한 추가적 공세로 발해부흥운동 국가인 흥료국의 건국을 틈타 압록강 동쪽을 공략하였으나 곧 실패하면서 흥료국의 지원 요청도 묵살하였으며 현종 재위 20년차인 1029년 거란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는데 거란의 지배 하에서 신음하던 발해 유민들이 동경 요양부(東京 遼陽府)를 거점으로 독립을 시도한 것입니다. 동경 요양부는 옛 고구려의 요동성이 있던 곳으로 발해의 영토였는데 주동자 대연림(大延琳)은 고려사에는 '발해 고왕 대조영의 7세손'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거란의 동경장군(東京將軍)직위를 가지고 있었는데 당시 갈수록 거란의 탈취와 강압적 통치가 심화되면서 동경 시민들은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대연림은 이러한 상황을 틈타 동경의 지방관들을 체포·제거한 후 통제권을 손아귀에 넣었으며 곧이어 국호를 '흥료(興遼)', 연호를 '천흥'(天興)이라 하고 나라를 건국했습니다.

 

이 때부터 흥료국과 고려의 접촉이 시작되는데 1차 연락은 1029년 9월 흥료국의 대부승(大府丞) 고길덕(高吉德)이 고려에 와 건국을 고(告)하고 구원을 요청한 것으로 고려사 곽원 열전에는 같은 해에 거란도 고려에 지원을 요청했다고 기록했습니다. 흥료국과 거란의 요청을 두고 현종이 고심하고 있을 무렵 당시 형부상서(조선의 형조판서)·참지정사 곽원이 현종에게 거란을 공격할 것을 주청했습니다. 곽원은 고려 조정의 대표적인 강경파였는데, 흥료국과 거란이 싸우는 틈을 타서 북진하여 영토를 확장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다른 대신들은 반대했으나 조정의 3인자급이던 곽원은 꿋꿋히 군사를 일으키고자 했고 결국 일으켰다고 합니다. 정식 인가를 받았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고 당시 고려의 군사 행동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됐는지 또한 기록이 부재하여 알 수 없으며 고려가 군대를 얼마나 동원했는지도 모르고 고려사 곽원 열전에는 단지 그 결과만 두 글자로 기록하였습니다. 불극(不克, 이기지 못했다는 뜻)으로 곽원은 이 군사 행동의 실패로 부끄럽고 화가 난 나머지 얼마 안가 1029년 11월에 홧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전합니다. 마찬가지 고려사의 기록 부재로 이때 거란의 반응 역시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추측할 수 있는 건 대연림은 9월에 지원 요청을 하였고, 북진 책임자 곽원은 11월에 죽었으니 고려의 북진은 아무리 길어도 2~3개월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급박하게 이어졌을 것으로 보입니다.

 

요사에서는 흥료국이 건국되자 거란이 고려에 사람을 보내 협조를 부탁하는 한편 보주에 발해태보(渤海太保) 하행미(夏行美)를 파견한 후 대비하여 격퇴했다고 나옵니다. 즉, 거란도 흥료국이 일어난 틈을 타 고려가 침공할 것을 미리 예상하고 이에 대비했다는 뜻입니다. 보주로 보낸 하행미에 의해 막혔다는 것을 보면 곽원은 보주를 공격하였고, 목적도 고려거란전쟁 중 빼앗긴 보주의 탈환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거란은 1015년 압록강을 건너 보주에 성을 쌓고, 고려 침공의 전초 기지로 삼았는데 이 곳은 요동과 한반도를 잇는 데다가 거란, 여진, 고려 등 3개 세력의 경계에 절묘하게 걸쳐있어 고려 입장에서는 가만히 두고보기에 상당히 껄끄러운 지역이었습니다. 이 때 곽원이 보주 공격을 실패한 뒤로 고려는 천리장성을 축조하고, 이 쪽 방면으로는 북진을 시도하지 않다가 예종 시기인 1117년에 금나라가 요나라와 발해 유민 고영창이 세운 대발해를 차례로 제압하고 요동을 차지하면서 아직 요나라 영토로 남아있던 내원과 보주가 고립되자 금나라, 요나라와 협상을 통해 두 성을 되찾는 데 성공합니다. 보주 혹은 포주의 명칭이 '의주'로 바뀐 것도 이 때부터입니다.

 

가을 9월 ○거란의 동경 장군(東京將軍) 대연림(大延琳)이 대부승(大府丞) 고길덕(高吉德)을 보내어, 건국(建國)을 고하고 겸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대연림은 발해(渤海)의 시조 대조영(大祚榮)의 7대손인데, 거란을 배반하여, 흥요(興遼)라 국호를 정하고 천흥(天興)이라 건원(建元)하였다 겨울 11월 ○참지정사(參知政事) 곽원(郭元)이 졸(卒)하였다. 곽원은 성품이 청렴하고 문사(文詞)를 잘하여 대성(臺省)의 직을 두루 거치면서 관리의 능력이 있다고 일컬어졌다. 그러나 자중(自重)하지 않아서 이작인(李作仁)과 친밀하게 지내었으므로, 사람들이 이 때문에 비난하였다. 흥요국(興遼國)이 거란을 배반하기에 미쳐서 몰래 아뢰기를, “압강(鴨江) 동쪽 경계에 있는 땅을 거란이 차지해 막고 있습니다. 지금 가히 거란의 보루(堡壘)를 이제 기회를 엿보아 취할 수가 있습니다.”하니, 최사위(崔士威)·서눌(徐訥)·김맹(金猛) 등이 모두 상서하여 불가하다고 하였으나, 곽원이 고집하고 군사를 보내어 공격했다가 이기지 못하자, 부끄럽고 분하게 여긴 나머지 등창이 나서 졸하였다. 2차는 1029년 12월 태사(太師) 대연정(大延定)[33]이 동여진(東女眞)과 북여진(北女眞)을 이끌며 거란과 전쟁을 시작했고 고려에 사신을 보내 지원을 걸(乞)했다.

고려사

 

최사위 열전에 따르면 현종은 대연정의 요청을 받고 여러 보신(輔臣)(조정의 고위직을 맡았거나 나이가 많은 신하)을 소환해 의논했는데 당시 문하시중 최사위는 "저(彼)들이 싸우는 것이 우리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 있겠지만 우선은 방어만 하자."며 의견을 올렸고 현종은 채택하여 지원을 불허(不許)합니다. 고려사 현종 세가나 유소 열전에는 대연정의 요청을 불허했다고 명시하고 있는데 5차에 걸친 요청 중 유일하게 대연정의 요청만 현종의 답변을 기술했는데 곽원의 군사 행동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와 현종이 직접 답했을 수도 있습니다. 곧이어 같은 달 서북면 판병마사(西北面 判兵馬事)유소를 최전방에 파견해 급변 상황을 대비하게 했으며 이 때부터 흥료국이 거란의 남부를 차지했음으로 잠시 고려와 거란 간의 연락은 단절됐습니다.당시 고려는 곽원과 같이 전쟁을 시작하자는 매파로서 유소, 왕가도 등 출병하여 거란의 성을 쳐부수자고 주청한 신하들도 있었고, 최사위와 같이 수성에 집중하자는 비둘기파와 서눌, 황보유의 등 외교로 풀자는 신하들도 있었습니다. 현종의 직접적인 의중은 어땠는지 알기가 힘들지만 처음 대연림이 병사를 요청했을 때 내부적으로 논한걸 보면 마음 한 켠에는 북진을 시도하려는 의지도 아예 없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곽원 열전이나 타 기록을 보면 조정은 전체적으로 반대하는 기류가 우세했고, 현종 또한 크게 호응은 하지 않았던 듯 합니다.곽원은 틈을 타서 의주를 탈환하자고 주장했지만 반대가 심해 독단으로 군대를 이끌고 갔고 거란도 이를 예측해 발해인 하행미를 보내 대비하고 있어 막아냈다고 합니다. 결국 북벌 책임자였던 곽원은 부끄러움에 등창이 나서 세상을 떠났고 이후 현종은 대연정의 지원 요청을 거부하며 수비적 태도로 돌아섭니다. 이는 고려의 내부 사정도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흥료국에게 도움을 줄 생각 자체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 시기는 1019년 고려거란전쟁이 끝나고 정확히 10년이 흐른 시기였는데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고려라는 국가가 완전히 회복되는데는 짧은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고려거란전쟁 동안 고려는 30만, 20만 대군을 계속 출정시켰고 백성들의 피로도가 높았으며 이는 거란도 마찬가지로 40만, 10만 대군을 계속 출진시키며 국력을 소비했고 흥료국과 같은 반란들이 일어나게 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회복된지 얼마 안됐으니 현종은 재차 전쟁을 일으키는 것에 부담을 가졌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며 대공사도 문제가 됐을 수 있는데 고려는 개경의 나성을 짓기 위해 20년을 썼습니다. 나성을 짓는 동안 인부들이 크게 고생하여 현종이 부담을 줄여준 기사가 남아있으며 나성 완공 후에는 조세를 걷지 않았을 정도였습니다. 또한 북방에 수많은 진(鎭)과 성(城)을 설치했는데 진과 성을 세웠으면 군대가 주둔해야 합니다. 군대만 있으면 충분하지 않고 그들을 보조해줄 인력이 추가로 필요하기에 장기 거주를 희망하거나 강요된 군인과 보조 인원들은 가족이나 친지를 데려올 것이고 이들이 또 정착하는데 시간이 걸리는데 그리하여 1029년에야 겨우 이런 공사들이 끝을 보았는데 곧바로 인력을 쭉쭉 소모하는 전쟁을 시작한다면 아무리 10년 동안 국력을 회복했어도 손실이 컸을 것입니다. 이외에도 흥료국과 거란의 체급 차이도 한 몫 했을 텐데 고려 입장에서야 1번 몰살시켜 본 거란이 싸울만하겠으나 동경 요양부와 그 근처 지역만 끌어모은 흥료국은 어차피 거란의 상대가 안됐기에 고려 입장에서는 이들을 도와주고 싶어도 승패가 뻔한 싸움에 끼어들고 싶진 않았을 것입니다. 거란 또한 흥료국 건국 후 고려의 개입을 크게 경계하여 겉으로는 고려에 사정을 설명하며 협력하자는 뉘앙스를 보내면서도 실제로는 고려의 침입을 대비하여 의주를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현종 10년(1019) 4월 ○ 병진(丙辰)에 진명선병도부서(鎭溟船兵都府署) 장위남(張渭男) 등이 해적선 8척을 잡아 적이 약탈한 일본 남녀 259명은 공역령(供驛令) 정자량(鄭子良)을 보내어 그 나라에 돌려보내도록 하였다.

高麗史》 권5, 무진 19년(1028)

○ 여름5월에 여진이 와서 평해군(平海郡, 慶北 蔚珍)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는데 적선(賊船) 4척을 추격해 잡아 그들을 모두 죽였다.

高麗史 권5

 

그 뒤 거란이 발해 유민들을 요의 본토로 강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려로 넘어왔는데 고려사에는 1030년부터 1033년에 이르는 3∼4년 동안 약 740명의 발해 유민이 흘러 들어왔다고 전합니다. 대연림이 고려에 수 차에 걸쳐 원군을 청했던 사실은 이 시기까지 여전히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의 역사 의식이 일정하게 남아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거란의 남부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하면서 여진과 발해인들도 거취에 여러 패턴이 나타나는데 우선 1029년에는 여진 총 500여 명이 배 40척을 타고 3번이나 고려를 공격했는데 고려는 이를 모두 격퇴했습니다. 거란인 조올(曹兀)이 자신의 가족을 데리고 귀화했고 여진 족장 쾌발(噲拔)이 자기 부족 200호를 데리고 귀화했으며 반대로 1030년에는 동여진이 5차례에 거쳐 말 수십 마리, 선박 7척, 검과 창, 철갑 수십 개, 화살 180,000개를 바쳤습니다.

 

4-4.문화 양성과 이른 나이의 요절

 

현종은 여러 환란 속에 엉망이 된 고려의 문물을 전면 재정비해, 향후 100년간 고려가 최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는데 황주량의 주도로 황실의 기록인 고려실록을 재편찬했고, 팔만대장경의 원본으로서 고려 불교문화의 정수인 초조대장경을 간행했으며, 교종 대사찰로 유명한 현화사의 건립을 지시했을 뿐 아니라 성종 이후 폐지된 연등회, 팔관회를 다시 부활시켰습니다. 그중 팔관회는 태조 왕건의 유훈으로써 최항의 권유에 따라 다시 개최한 것인데, 대내적으로는 고려 고유의 해동천하관을 견고히 하고, 대외적으로는 천자국으로서 고려의 위상을 만천하에 드러내기 위한 국가 중흥책의 일환이었습니다. 대거란전쟁이 끝난 후 고려는 높아진 위상에 걸맞는 국가체제를 갖추게 되었고 문호가 더 개방되는 국면을 맞이했는데 동아시아에서 최강국이었던 거란과 대등한 국가위상을 확보한 고려는 황제국체제皇帝國體制의 실상에 걸맞는 번방蕃邦을 가지게 된 단초를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열어나갔고, 팔관회八關會에서 보듯이 그에 상응하는 국가 의례를 본격적으로 시행하게 되었습니다. 현종은 강감찬처럼 능력있는 신하들을 계속 기용했지만 다른 누구보다도 현종 본인이 고려를 위해서 가장 열심히 일했고 결국 82세에 세상을 떠난 강감찬보다도 3개월 일찍 젊은 나이 38살22년간 왕위에 있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현종은 드라마틱한 인생과 군주로서의 탁월한 업적에 비해서 한국사에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며 조선의 세종대왕에 비견도리만큼 고려의 세종대왕급 성군이었으며 드라마나 소설 속 소재로 삼아도 거젓말처럼 느껴질만큼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다간 고려 최고의 현군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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