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전쟁은 전쟁이라는 국난의 위기에서 왕을 시해한 강조가 30만 대군을 이끌고 40만 대군의 거란군과 맞서 싸웁니다.강조는 고려 초기 문관이자 권신으로 고려 왕실 쿠데타 수난사의 시초 격인 강조의 정변을 주도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강조는 목종으로부터 큰 신뢰를 받았으나, 되려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옹립했으며거란이 고려를 침범했을 때는 직접 출정했고, 초반에는 선전하다가 통주 전투에서 패배하고 사로잡혀 요나라 성종의 회유를 받았지만 완강히 거부하면서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맙니다.
목차
1.강조,고려사 최초의 반역자 군인으로 낙인찍히며 지워지다
1-2.강조의 정변
1-3. 제2차 고려거란전쟁 발발
1-4.몇번의 승리와 방심이 만들어낸 통주전투 패배
2.기개를 꺽지 않은 장렬한 최후
2-1.강조에 대한 다양한 평가
2-2.강조의 죽음 이후 고려 불세출의 성군 탄생
3.고려 최초의 역신에 대한 반면교사
3-1.대중매체속에서그려진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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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조,고려사 최초의 반역자 군인으로 낙인찍히며 지워지다
강조는 반역자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그의 가문이나 성장 과정에 대해서는 고려사 열전을 비롯해서 어느 곳에도 기록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정확한 출신지도 알 수 없으나 일단 신천 강씨 집안 사람일 가능성이 유력한데 실제 신천 강씨는 자신들의 조상으로 강조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기도 합니다.그렇다면 황해도 신천이 출신지일 가능성이 높고 이른바 고구려계 패서 호족 계열의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신천 강씨 족보에는 시조 강충(康忠)부터 그 14세손인 중시조 강지연(康之淵)까지 독자(獨子)로만 이어지는데, 강충의 7세손이 형부상서를 지낸 강태주이고, 강태주의 아들이 이부상서를 역임한 강억(康億)입니다. 그런데 강조는 정변 이후 이부상서가 되었으며 조(兆)는 억(億)의 만 배입니다. 따라서 강조의 후손들이 강조가 반역자로 분류돼서 족보에서 이름을 지우고는 싶은데 자신들의 직계 조상이라 차마 지우지 못하고 남들이 모르게 이름만 비슷하게 바꾼 것 아닐까 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1-2.강조의 정변
강조는 서북면 도순검사로서 북방 군대를 순찰하고 있던 중 어머니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자신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품자 목종이 강조를 빨리 내려오게 해 자신을 호위하게 하지만 강조는 도리어 목종을 폐위시키고 대량원군을 옹립해 버립니다. 1009년 2월 3일, 강조는 본격적으로 움직이는데 합천에서 갓 도착한 17세의 대량원군을 즉위시킨 뒤 목종을 폐위하고 양국공(讓國公)으로 끌어내린 뒤 고향 충주로 내려가고자 하던 그를 부하들인 김광보와 안패를 보내 현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에서 시해해 버립니다. 이후 천추태후를 황주로 유배시키고 친족을 섬으로 유배, 김치양과 그의 6살 아들, 목종에게 빌붙어 전횡을 일삼던 유행간 등을 죄다 처형하거나 귀양을 보내면서 천추태후 - 김치양 세력과 자신에게 걸림돌이 될만한 이들을 완전히 제거해 버립니다. 강조는 이어서 2월에 중대사(中臺使),3월에 이부상서(吏部尙書)및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승진해 요직을 차지합니다.
강조가 목종을 폐위한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강조가 목종이 시해되었다는 거짓 정보를 듣고 개경 근교까지 휘하 군을 이끌고 진군하였는데 목종이 아직 멀쩡히 살아 있다고 하자 이미 여기까지 군대를 끌고 와 버렸는데 반역으로 몰릴까 두려워 폐위시켰다는 설과 강조가 평소에 우유부단하고 추문이 많은 목종에게 불만을 품고 새로운 왕을 옹립하기 위해 폐위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1-3. 제2차 고려거란전쟁 발발
고려 행영 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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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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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
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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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영도통부사(行營都統副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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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시랑(吏部侍郞)
이현운 |
병부시랑(兵部侍郞)
장연우(張延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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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관(判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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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거사인(起居舍人)
곽원 |
시어사(侍御史)
윤징고(尹徵古) |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郞)
노전(盧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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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제관(修製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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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습유(右拾遺)
승리인(乘里仁) |
서경장서기(西京掌書記)
최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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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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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군사(統軍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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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부상서(刑部尙書)
최사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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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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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하 장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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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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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조의 정변 이후 문제는 북적(北狄) 거란이 호시탐탐 고려를 노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요성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거란과 잘 지내던 목종을 함부로 시해한 반역자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명분으로 의군천병(義軍天兵)이란 이름을 붙인 40만 대군을 직접 이끌고 고려를 침략하기에 이릅니다. 물론 요성종이 진짜로 목종을 시해한 죄를 묻기 위해 침공한 것은 아니었는데 주요 이유는 당시 거란이 맞수였던 송나라와 일종의 휴전 협정인 전연의 맹을 맺고 한숨 돌린 틈을 타 자신들의 후방을 든든히 하려는 목적이 컸습니다. 중원을 차지하려면 일단은 송나라와 친하게 지내던 후방의 가시같은 고려부터 가장 먼저 잠재워야 했고, 마침 고려가 내부적으로 혼란스러워지자 곧바로 기회를 노리고 쳐들어온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강조는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직위를 받아 군권을 위임받고 직접 출진합니다.
사료에서는 조정의 명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강조가 이미 실권을 장악했고 그 과정도 자발적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군권의 위임 과정도 조정의 결재는 요식 행위이고 강조 본인이 처음부터 계획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제2차 고려거란전쟁 때 고려는 30만 대군을 소집하였는데 강조는 고려의 실권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개경에 머무르지 않고 최고 사령관으로써 직접 출전했던 것입니다. 강조가 거란군에게 포로로 잡혔을 때의 행적을 보면 고려의 장수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출전했다는 해석도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강조가 책임감이 부족했다고 해도 출전이 불가피한 상황임은 분명했는데 이때 강조는 전왕을 시해하고 새로운 왕을 옹립함으로써 사실상 정권을 장악한 상태였음에도 권력 기반이 매우 취약했는데 당시 중신 중 한명이자 목종으로부터 현종의 호송 임무를 명 받았던 최항이 정변을 일으켜 군왕을 끌어내린 강조를 보고 "고금에 이러한 일이 있었느냐?!"며 대놓고 일갈할 정도였습니다.
당시 명백한 권력자였음에도 면전에서 대놓고 비판을 들을 정도로 초기부터 권력 기반과 입지가 불안정했다는 것과 거란이 자신의 집권을 명분으로 침공했는데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반대 세력에게는 "강조 저 놈 때문에 거란이 쳐들어 왔는데도 자신은 겁나서 출전도 하지 않고 비겁하게 숨어 있다."라는 비판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30만이라는 대규모 병력을 지휘해야 하는 상황인데 강조에게는 자신을 대신해서 병력 지휘를 맡겨서 출전할 정도로 신뢰할 수 있는 인사도 전혀 없었으며 결국 본인이 울며 겨자 먹기로 출전해야 했던 것입니다. 거란군이 국경 지역인 흥화진에서 양규가 지휘하던 고려군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자 요성종은 약간의 별동대를 귀주 방면으로 보내고 본대는 빠르게 강조가 주둔한 통주로 진군하여 이틀 만에 도착하게 됩니다. 야전으로 승부를 보기로 한 강조는 전체 부대를 셋으로 나누어 한 부대는 전면, 또 한 부대는 배후 요새와 전면에 나선 부대 사이의 후퇴로를 지키기 위해 성 근처, 나머지 한 부대는 주변 고지에 주둔시켜 굳건히 지키게 하였으며 하천을 기병 기동을 방해하는 천연 참호로 이용하여 측면 강습을 막고 전면에는 검차(劍車)를 배치하여 첫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이에 대한 기록을 보면,
兆引兵 出通州城南. 分軍爲三 隔水而陣. 一營于州西據, 三水之會, 兆居其中. 一營于近州之山, 一附城而營. 兆以劒車排陣 契丹兵入, 則劒車合攻之, 無不摧靡. 契丹兵屢却, 兆遂有輕敵之心, 與人彈棋.
조가 군대를 이끌고 통주성 남쪽으로 나아갔다. 군사를 셋으로 나눠 물과 거리를 두고 진을 쳤다.
하나는 통주 서쪽에 쳤는데 세 강물이 만나는 곳으로 조는 이 곳에 머물렀다.
하나는 통주 근처의 산에 쳤으며, 하나는 성에 붙여서 진영을 만들었다.
조는 검차로 진을 세워 거란병이 들어오면 검차로 합공하니 (거란병이) 꺾거나 쓰러뜨릴 수가 없었다.
거란병이 번번히 퇴각하자 점차 적을 가볍게 여겨 사람과 알까기나 했다.
고려사 권127 열전40 반역1
1-4.몇번의 승리와 방심이 만들어낸 통주전투 패배
지속적으로 거란군을 밀어내는데 성공하자 강조는 긴장이 풀렸는지 점차 방심하기 시작했는데 한편 거란군은 대군이 한 번에 들어가기는 어려우니 전략을 바꿔 소수 부대로 빠르게 치고 나오기로 합니다. 그리하여 선봉 야율분노, 야율적로를 파견해 삼수 쪽 진영을 치고 빠지는 식의 속도전으로 나오지만 강조는 처음 삼수 쪽 진영, 즉 자신이 있는 진영이 뚫렸다는 보고를 받고 믿지 않았으며(소수만 잠시 들어온 것으로 여겼을 수도 있다)
如口中之食 少則不可宜. 使多入.
마치 입안의 음식처럼 적으면 만족스럽지 않다. 더 들어오게 해라.
이 때 강조의 부대를 격파하는데 선봉에 선 부대가 '우피실군'인데, 거란군의 최고 정예인 이들의 기동력이 강조의 예상보다 훨씬 뛰어나서 미처 고려군이 협공하기도 전에 지휘부가 붕괴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기해. 강조(康兆)가 병사들을 이끌고 통주성(通州城) 남쪽으로 나가 군사들을 세 부대로 나누어 강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한 부대는 통주의 서쪽에 진영을 만들어 삼수채(三水砦)에 주둔하였고, 강조가 그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또 한 부대는 통주 인근의 산에 진영을 만들었고, 다른 한 부대는 통주성에 붙어서 진영을 만들었다.
강조가 검거(劍車)를 배치하여 거란(契丹)의 병사들이 침입하면 검거가 함께 공격하였으니, 쓰러지지 않는 자들이 없었다.
거란 병사들이 누차 패퇴하자 강조는 마침내 적을 경시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과 바둑을 두었는데,
거란의 선봉장이었던 야율분노(耶律盆奴)가 상온(詳穩) 야율적로(耶律敵魯)를 거느리고 와서
세 강의 합류지점에 있던 진영을 격파하였다. 진주(鎭主)가 거란의 병사들이 이르렀다고 보고하였음에도 강조는 믿지 않고 말하기를,
“입 속의 음식과 같아서 적으면 좋지 않으니, 많이들 들어오게 놔두라.”라고 하였다. 재차 급변을 보고하여 말하기를,
“거란 병사가 이미 많이 들어왔습니다.”라고 하니, 강조는 깜짝 놀라 일어나며 말하기를, “정말인가.”라고 하였다.
마치 목종(穆宗)이 그 뒤에 서서 “네놈은 끝났다. 천벌을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라고 그를 꾸짖는 모습을 보고 있는 양
몽롱한 상태가 되더니, 강조는 즉시 투구를 벗고 꿇어앉아 말하기를,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말을 미처 다 마치기도 전에 거란 병사들이 들이닥쳐 강조를 결박하였다.
이현운(李鉉雲)과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郞) 노전(盧戩), 감찰어사(監察御史) 노의(盧顗) · 양경(楊景) · 이성좌(李成佐) 등은 모두 사로잡혔으며, 노정(盧頲)과 사재승(司宰丞) 서숭(徐崧), 주부(注簿) 노제(盧濟)는 모두 전사하였다.
거란이 담요로 강조를 말아 싣고 가버림으로써 아군이 큰 혼란에 빠지니,
거란 병사들이 승기를 타고 수십 리를 추격하여 30,000여 급의 머리를 베었고, 버려진 식량·갑옷·무기들은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였다. 거란의 군주가 강조의 결박을 풀어주고 묻기를,
“너는 나의 신하가 되겠느냐.”라고 하니, 강조는 대답하기를,
“나는 고려(高麗) 사람이다. 어찌 다시 너희의 신하가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재차 물었으나 대답은 처음과 같았고, 다시 살을 찢으며 물었으나 대답은 또한 처음과 같았다.
거란의 군주가 이현운에게도 물어보니, 대답하기를,
“두 눈이 이미 새로운 해와 달을 보았는데 하나의 마음으로 어찌 옛 산천을 생각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강조가 분노하여 이현운을 걷어차면서 말하기를,
“너는 고려 사람인데, 어떻게 이런 말을 하는가.”라고 하였다.
이때에 거란 병사들이 멀리까지 말을 달려 전진하였는데, 좌우기군장군(左右奇軍將軍) 김훈(金訓) · 김계부(金繼夫) · 이원(李元) · 신영한(申寧漢)이 병사들을 완항령(緩項嶺)에 잠복시켰다가 모두 단병(短兵)을 집어 들고 갑자기 튀어나와 패배시키니,
거란 병사들이 조금 물러났다. 강조가 방심하다가 거란군에게 대패하여 붙잡혔으나,
끝내 절의를 꺾지 않다
/고려사절요 권3 현종원문대왕(顯宗元文大王), 현종(顯宗) 1년(1010년) 11월 24일(음) 기해(己亥)
적이 이미 안까지 깊숙히 들어왔다는 보고를 또 받자 그제서야 사태가 여간 심각해진 게 아님을 비로소 깨닫는 강조는 다른 두 진영이 협공하기 전에 본인의 진영이 먼저 붕괴되자 이제는 끝이라는 것을 깨닫고 무릎을 꿇고 일어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고려사에서는 이 때 강조가 본인 앞에 나타나 "이제 네 놈은 결코 천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호통을 치는 목종의 혼령을 보고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며 무릎 꿇고 빌었다고 전하며 이후의 장렬한 죽음과 연관해 볼 때 뒤늦게나마 자신의 행위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깨닫고 목종을 떠올리며 후회한 것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강조의 방심이 한몫하기는 했지만 일부 평가에서는 "전술적 부분보다는 병사들의 숙련도가 강조의 지시에 대해 그만큼 빠르게 반응하지 못한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습니다.
혹은 제 아무리 많은 병력이 있어도 한군데 뭉쳐 기동력이 제한되어버리면 그냥 앞줄의 병사 때문에 안 쪽의 병사들은 우왕좌왕 해버려 뭉치가 되어버리기 십상인데 이런 점을 이용해 강조는 "거란군은 기동력을 우선시하는 군이라 이를 제한시켜버리기만 하면 승리할 수 있을 거라 판단"했을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일반적으로 크게 나쁘지는 않은 판단이었지만 문제는 거란이 그것을 무시할 정도의 엄청난 기동력을 보여줬다는 것으로 실제 거란이 기동력을 살려 소수 정예군만으로 휘젓는다면 정예 '우피실군'이 많은 손상을 입기는 하겠지만 엄청난 기동력을 회복하니 전 같은 몰아죽이기 전략은 안 통했을 것입니다. 결국 거란은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전략을 썼고, 강조는 이 점을 놓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이 통주 전투에서 강조가 지휘하던 30만 고려군이 거란군에게 대파되면서 순수 전사자만 무려 3만명이나 발생했으며, 그 외 이현운과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郞) 노전(盧戩), 감찰어사(監察御史) 노의(盧顗) · 양경(楊景) · 이성좌(李成佐) 등도 모두 덤으로 사로잡혔고, 노정(盧頲)과 사재승(司宰丞) 서숭(徐崧), 주부(注簿) 노제(盧濟)는 모두 그 자리에서 전사하는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게 됩니다.
2.기개를 꺽지 않은 장렬한 최후
契丹兵已至, 縛兆裹以氈載之而去.
거란군이 들어와 강조를 결박한 후 담요로 싸서 운반해 갔다.
고려사 권127 열전 40 반역1
통주 전투에서의 대패 후 포로로 잡힌 강조는 결국 거란 요나라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고 요나라군에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고려가 거짓말처럼 승리할 것을 우리들은 알고 있지만 당시 강조 입장에서 거란의 침공은 고려라는 나라의 사활을 자기 손으로 뒤집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여겨질 만하니 심리적으로 압박감과 죄의식을 느껴도 이상하지 않은데 강조의 최후는 당시 강조와 함께 포로가 된 오랫동안 자신의 부하로 활약한 이현운이라는 자와 대비되는 장렬한 죽음으로 기록되었습니다.
契丹主, 解兆縛, 問曰:"汝爲我臣乎?" 對曰 :"我是高麗人, 何更爲汝臣乎!" 再問, 對如初。 又剮而問, 對亦如初。 問鉉雲, 對曰:"兩眼已瞻新日月 一心何憶舊山川?" 兆怒, 蹴鉉雲曰:"汝是高麗人 何有此言!" 契丹遂誅兆。
거란주가 조의 포박을 풀고 물었다: "넌 내 신하가 될 것이냐?"
(강조가) 답하니: "난 고려 사람이다, 어찌 너(汝)의 신하가 되겠느냐?"
다시 묻자 처음과 같이 답했다. 다시 살을 베어가며 묻자 답은 여전히 처음과 같았다.
현운에게 물으니 답하길: "두 눈이 이미 새 일월을 담았는데 어찌 옛 산천을 기억하겠습니까?" 조가 분노해 현운을 차며 말했다
"너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거란은 결국 조를 주살했다.
/고려사 권127 열전 40 반역 1
강조는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시해했지만, 자신이 왕이 되려는 역심 자체는 없었습니다.
兆坐乾德殿御榻下, 軍士呼萬歲. 兆驚起跪曰, “嗣君未至, 是何聲耶?
조가 건덕전(乾德殿)의 어탑(御榻) 아래에 앉으니 군사들이 만세를 외쳤다. 조는 놀라 일어나 꿇어앉으며,
“다음 임금이 오시지도 않았는데 이 무슨 소리인가?”라고 말했다.
/고려사 권127 열전40 반역 1
이후에 역성혁명을 일으키는 자들도 선위 받기에는 시기상조이거나 명분을 더 확보하기 위해 일단 "나는 절대로 새 군주가 될 생각이 없으며 단지 새로운 분을 군주로 모시려 할 뿐이다."라고 허울 뿐인 충성 코스프레를 하는 사례가 흔했지만 이후 강조의 행적을 보았을 때 권력욕 자체는 있었어도 역심은 없었을 가능성 역시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애초에 무리해서 황제 자리에 오르는 것보다 얼굴마담 하나 세워놓고 본인이 권신으로 권력을 훨씬 휘두르는 게 나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게다가 강조가 실권을 잡고 뭘 해보기도 전에 거란과 싸우다 붙잡혀 처형된 탓에 지금에 와서는 모든게 가설의 영역이 되어 버렸는데 외치 부분에서는 당시 고려의 일개 무장도 아닌 최고 권세가가 직접 최전선에 나가 목숨 걸고 싸운 점만큼은 분명 호평받을 만하지만 일단 명분론적으로는 거란의 침공 자체가 자신이 일으킨 정변 때문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강조가 출전하지 않는 것이 어찌 보면 더 이상했으며 또한 자신이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군권을 맡겼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 강조 자신이 직접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합니다.그래도 포로로 잡힌 뒤 요 성종의 회유를 받아들여 생존을 도모할 수 있었고, 특히 살이 찢겨져나가는 극형을 받으면서까지도 스스로를 "나는 뼛속까지 고려인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이다 장렬하게 최후를 맞은 것을 보면 강조는 고려 왕가에 대한 충신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고려인이란 정체성만큼은 확실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2-1.강조에 대한 다양한 평가
일반적인 간신들처럼 단순히 권력만을 탐하는 것이라면 그냥 요 성종의 항복권유를 받아들였을테니. 심지어 정벌의 명분이 반역을 저지른 강조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사로잡자 황제 본인이 직접 나서서 투항을 권유한데다가, 강조 본인의 참패로 고려의 전쟁 수행 능력이 박살난 상황에서도 끝까지 절개를 부르짖은 만큼 이 부분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보입니다. 내치 부분에서 강조는 집권 이후 본인이 선전한 대로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든 천추태후와 김치양과 그 휘하 일당들을 전부 보내버렸는데 문제는 자신에게 명을 내린 목종마저 폐위 후 시해해버리고 현종을 옹립해 졸지에 권신이라는 낙인이 찍혀버렸다는 것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얼마 안 가 거란의 침입으로 본인과 휘하 세력이 전부 쓸려 나가면서 순식간에 정적들이 사라져버린 현종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뜻대로 정치를 펼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매우 단편적인 시각이기도 한 것이, 당장 강조의 고려군이 대패하면서 현종은 왕권 강화는 커령 고려라는 나라 자체가 멸망 직전의 사태를 맞이해 수도 개경을 버리고 남쪽의 나주시까지 몽진을 떠나야 했고, 피난 와중에도 사실상 반란군이나 다름없던 지방 호족들에 온갖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2-2.강조의 죽음 이후 고려 불세출의 성군 탄생
강조의 죽음 이후 고려는 조선의 세종대왕과 맞먹을 정도로 한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성군 현종을 탄생시키는데 현종은 이후 전란을 수습하고 고려의 전성기를 열어 버립니다.덕분에 강조도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얼굴마담 현종이 알고 보니 능력자라고 재평가받는 측면도 더러 있습니다.그래도 임금을 시해하고 권신이 된 점이 못마땅했는지 고려사의 반역 열전에 그 이름을 올리고 맙니다.사실 강조는 함부로 정변을 일으켜 임금을 폐위한 것으로도 모자라 시해한 것이 가장 임팩트가 컸지만, 목종에게 멋대로 시호, 묘호, 능호를 올린 것도 큰 문제였을 것입니다. 군주의 시호와 묘호, 능호를 정할 때는 먼저 신하들과 논의한 후 現 왕이 최종 결정을 하는데, 강조는 신하들과의 논의와 왕의 재가도 무시한 채 멋대로 올려버렸는데 이렇게 올려진 시호와 묘호, 능호는 후에 현종에 의해 수정됩니다. 유교를 받아들인 조선에서 삼강오륜을 저버린 강조를 위인으로 대우해 줄 수 없었고, 고려사에서는 죽을 때 비로소 목종의 혼령에게 잘못을 빌었다는 식의 서술을 추가했습니다.
한편으로 현종과 강조의 관계에 있어 짐작해 볼 기사가 있는데, "현종 2년 8월에 강조의 일당들을 유배 보냈다."는 기사가 그것인데 이때 강조의 일당으로 지목된 5명 중 3명이 정변 당시 강조의 부하였거나 강조의 편에 섰던 이들로, 탁사정은 정변 당시 강조에게 붙었고,최창과 위종정은 강조의 부하들로서 강조가 쿠데타를 일으키도록 부추긴 인물들입니다. 물론 대부분은 잘 나갔지만, 저 5명을 강조의 일당이라고 엮어 부른 것은 정치적인 이유로 숙청했을 것이고, 그 이유는 강조와 관계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당대에 실제로 강조에 대한 평가는 자료의 부족으로 알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기도 합니다.
3.고려 최초의 역신에 대한 반면교사
고려사 최초의 쿠데타 성공자이던 강조의 죽음은 이후 후대 쿠데타 세력에게 교훈을 줬는지 후대의 최씨 무신정권은 몽골의 침략에 본인들이 직접 싸우지 않고 도망쳐 수비만 하면서 몸보신에만 신경썼으며 당연히 그 와중에 국토는 짓밟히고, 죽어나간 건 힘없는 백성들이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신립과도 묘하게 행적이 겹치는 부분이 있는데 북방에서 경력을 쌓았지만 일대 회전에서 패배하여 죽음을 맞았고 그 패배로 인해서 왕이 피난까지 갈 정도로 나라가 위기일발의 상황에 빠졌다는 점이 비슷한데 강조는 현종을 옹립한 권신이고, 신립은 선조의 사돈이라 당시 왕과 밀접한 관계인 인물들이라는 점도 겹칩니다.신립과 비교했을 때 강조는 기록상으로는 통주 전투를 뺀 특별한 전적이 보이지 않지만 신립은 임진왜란 이전 니탕개의 난에서 활약한 조선 수위급 용장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본인들의 마지막 전투인 통주 전투와 충주 탄금대 전투를 비교하면 강조는 초반에는 선전했지만, 신립은 일본과 명나라한테 모두 놀림감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심하게 졸전을 펼쳤습니다.그래도 최후는 둘 다 패전의 책임을 지고 비참히 생을 마감했으니 비슷할지도 모릅니다.
다만 반론도 있는데, 신립도 사실은 탄금대 전투에서 초반엔 상당히 선전했으며, 어차피 고니시 유키나가 군을 이겼다고 해도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가토 기요마사 군에게 협동당해서 참패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령 사수는 현실적인 문제점이 굉장히 많이 있는데, 대다수 병력이 농민 징집병이라 고도의 훈련이 필요한 매복기습작전 수행 능력에 차질이 있으며, 도주의 우려가 컸고, 기병의 기동성을 살리기도 어려웠으며, 당시 조령에는 요새시설조차도 전무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니시군과 가토군, 구로다 군이 모두 한꺼번에 북상중이었기에 한양북상저지는 현실적으로 불가하며, 아마 더 끔찍하게 패전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또한 강조의 삶은 600년 뒤 이괄의 난을 일으킨 이괄과도 비교해 볼 수 있는데, 북방의 방비를 담당한 장수들이었으며, 반란을 일으켜 흥안군을 왕으로 세웠다는 점까지는 비슷하지만 이괄은 인조반정 이후 다른 공신들에 밀려 권력 중심에서 밀려나야 했고, 이괄의 난 때는 초기 승승장구에 자만했는지 전략을 잘못 짜서 실패하고 부하들의 배신으로 목숨을 잃고 맙니다. 그에 비하면 강조는 자신이 거사를 안 하면 꼼짝없이 왕위가 김치양의 아들에게 넘어가 왕씨의 사직이 끊길지도 모르는 위급한 상황이었기에 정변의 명분이 충분했으며, 애초에 목종의 명으로 개경 진격을 준비한 것이었습니다. 이괄이 국왕으로 세운 흥안군은 강조가 국왕으로 세운 현종보다 능력과 평판이 좋지 않았는데 오죽하면 일반 백성들조차 이괄이 흥안군을 국왕으로 세웠으니 오래 가지 못하겠다는 발언까지 하였을 정도라고 합니다. 실제로 이괄이 패한 이후 흥안군도 국왕이 된지 단 3일만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본래 임금의 충신이었고 최전방 방위 총책임을 맡을 정도로 능력도 출중했으나 임금이 죽었다는 헛소문에 반란을 일으킨 것은 로마제국 시대 인물 아비디우스 카시우스와 비슷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3-1.대중매체속에서그려진 강조
①만화:웅진출판사에서 펴낸 역사 만화인 한국의 역사에서는 거란 왕의 항복 제의를 거부하고, 항복해서 부하가 되겠다는 이현운의 얼굴을 "이런, 쓸개빠진 놈!"이라고 욕하면서 걷어차 버린 뒤 "내가 임금을 죽인 게 네놈들에게 나라를 바치려고 그런 줄 알았느냐?"라고 일갈하는 장면이 들어가기도 했으며 어느 강감찬 위인전에서는 요 성종에게 고개를 쳐들고 "난 비록 왕을 배신했어도 나라를 배신하지는 않는다. 네놈에게 머리숙여 굴하지 않을 테니 정 굴하게 할려면 내 목을 벤 다음에 목을 가지고 머리를 숙이거라."라고 일갈하는 대사를 넣기도 했습니다. 1990년대 어느 출판사 버전에서는 요 성종을 비웃으며 고문을 받음에도 크게 일갈하고 웃으며 숨을 거뒀다는 창작을 넣기도 했는데 마냥 조작이라고 보기에는 실제 역사와도 큰 맥락이 일치하기도 합니다.
②다큐멘터리:2019년 방영한 JTBC 창사특집 다큐멘터리 평화전쟁 1019에서는 1부에서 배우 문종영이 연기했는데 출정 전 현종을 썩소지으며 쳐다보는 등 권신으로서의 모습이 부각되었으며 죽음도 통주 전투에서 첫 승리에 방심했다가 결국 패해 죽었다는 것만 수급이 걸린 모습과 함께 보여주고 나름 장렬했던 최후는 생략당했습니다.
③드라마 강감찬:1973년 KBS 드라마 강감찬에서는 남성우가 연기했는데 옛날 작품인 탓에 필름이 남아 있지 않아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남아있는 기록에 따르면 거란의 1차 침공 때 양규와 강감찬과 함께 강화론에 반대하였고, 후에 정변을 일으키고 거란의 침공 당시 삼수채에서 2만이 넘는 거란군을 물리쳤으나, 거란의 결사대에 생포되어 귀순을 권유받았으나 거부하였으며 또한 드라마에서는 서희가 강조의 야심을 경계하였다고 합니다.
④천추태후:2009년 KBS 대하드라마 천추태후에서는 배우 최재성이 연기했습니다. 전형적인 우직한 맹장으로 등장하는데, 작중 등장 인물들 중에서 무력이 혼자 궤를 달리하는데 어느 정도냐면 혼자서 어지간한 무장 2 ~ 3명 따위 거뜬히 제압하며 거란 최고의 맹장이라는 야율분노까지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무력으로 치면 양규와 함께 투톱이었는데 뜬금없이 천추태후(채시라 분)를 짝사랑하는 설정도 붙었는데 은근히 순정남으로 천추태후와 가까워지는 김치양(김석훈 분)을 싫어했습니다. 나중에 그를 짝사랑하던 천향비(홍인영 분)와 결혼하는데 천향비가 김치양의 정체를 추적하다가 살해당하자 안 그래도 미워했던 김치양을 더욱 미워하게 되었으며 북방으로 떠난 후에 김치양의 반란이 일어나자 즉시 황궁으로 돌아와 김치양 일당을 쳐부수는데 강조의 정변 부분은 역사 왜곡이 많이 곁들여져 있습니다.역사 기록에서는 거란 성종에게 잡혀갈 때 모포말이를 당하는 굴욕을 당하고 모진 고문 끝에 죽었다고 하지만, 여기서는 마지막에 성종을 암살하려다가 진삼국무쌍을 한 판 찍고 장렬한 최후를 맞습니다.특이한 점이라면 사극에 등장하는 주연인데도 불구, 검이 아니라 창을 썼다는 것입니다.
⑤고려거란전쟁:2023년 방영 KBS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서 이원종이 배역을 맡아 강조의 정변이 초반부에 다루어졌으며 7회분에서는 통주전투에서 야습한 거란군에게 생포당한 후 화형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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