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대 한국사의 미스테리/고조선의 역사

역사학자들이 바라본 단군조선의 상투와 비파형동검,다뉴세문경에 담긴 초정밀기술-5천년전 고조선은 거대문명국이었다 ③

by 캐쉰 2024. 2. 3.
728x90
반응형

역사학자들이 바라본 단군조선의 상투와 비파형동검,다뉴세문경에 담긴 초정밀기술-5천년전 고조선은 거대문명국이었다①②편에 이어서 ③편에서는 군사적으로도 고조선이 얼마나 강대한 국가였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더보기

목차

 

1.최강의 무기를 제련한 군사강국

1-1.고조선의 청동가공기술과 제철제강기술

1-2.고조선의 청동갑옷 및 무기류

1-3.고조선과 한무제와의 전쟁

1-4.내부의 배신으로 전투에 승리하고 전쟁에 패배한 고조선

2.함께 읽으면 좋은글

 

1.최강의 무기를 제련한 군사강국

 

역사학자들이 바라본 단군조선의 상투와 비파형동검,다뉴세문경에 담긴 초정밀기술-5천년전 고조선은 거대문명국이었다 ③

 

 

청동가공기술은 단군조선 이전 시기에 벌써 시작됐지만, 단군조선 성립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해 동아시아에서 가장 선진적인 청동기술을 보유하게 됐는데 고조선 청동기술은 다른 나라와 다른 특징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다른 나라의 경우 대부분 구리 주석의 이원소 합금법을 사용한 반면, 고조선의 경우에는 구리,주석,납의 3원소 합금법을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합금 원소들 각각의 성질을 파악한 데 기초해서 용도에 맞게 합금비율을 조성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고조선의 청동기술의 우수성과 과학성을 실증해주는데 고조선의 청동가공기술의 선진성과 높은 기술 수준은 청동거울과 검집에 새겨진 번개무늬가 매우 섬세하게 새겨져 있는 데서도 확인되며, 직경이 0.25mm 밖에 안되는 가는 구리실을 뽑아서 천을 짜듯 엮어 만든 강상무덤의 청동그물 장식품을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가는 구리실을 뽑아서 그물을 엮는다는 것은 고도로 높고 섬세한 제련가공기술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실현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고조선의 청동가공기술의 백미는 잔줄무늬 거울입니다. 1960년대 충남에서 발견된 잔줄무늬 거울은 서기 전 4세기경의 유물인데, 지름 21.2cm의 이 거울 안에는 모두 1만3300개의 가는 선과 100여개의 동심원이 그려져 있습니다. 선과 선 사이의 간격은 0.3∼0.5mm인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것이 주물품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잔줄무늬거울은 고대 우리 선조들의 청동가공기술과 문화예술수준의 우수성을 보여주는데 잔줄무늬거울은 그 형태와 도안의장에서의 독특성, 무수한 잔줄의 세밀한 조직구성과 한점 티도 없이 주조한 주조술의 정교성 등을 통하여 고조선의 고대청동공예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 주고 있기도 합니다. 고조선은 고인돌과 비파형동검의 나라라고해도 과언이 아닙니다.고인돌들은 강력한 왕권이 아니라면 곳곳에 세울 수 없는 것이며 비파형동검과 다뉴세문경은 세밀한 청동가공기술이 필요한 당시의 반도체 기술력의 집합체라 할 수 있습니다.

 

역사학자들이 바라본 단군조선의 상투와 비파형동검,다뉴세문경에 담긴 초정밀기술-5천년전 고조선은 거대문명국이었다 ③

 

다뉴세문경이라는 이름은 유가 많고 세밀한 문양이 있는 거울'이란 뜻으로 여기서 鈕(뉴//유)란 한자는 거울을 매달 수 있도록 옛날 거울의 뒷면에 만든 고리, 또는 도장의 손잡이(인꼭지) 부분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다뉴(多鈕)'란 거울 뒷면의 고리가 많다는 뜻입니다.이름처럼 거울 뒷면에 유가 2개 있으며 현재는 '다뉴세문경'이라는 이름보다는 '정밀한 문양이 있는 거울'이란 뜻인 정문경(精文鏡) 또는 잔무늬거울이라는 우리말을 정식명칭으로 사용합니다.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청동거울'은 한반도 남부지역과 중국,일본에서도 흔하게 출토되는 대표적인 고대유물로 알려져 있는데 1960년대 논산시에서 기존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청동거울 한 좌가 새롭게 발견되면서 학계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지름 21.2 cm 안을 큰 원 세 개로 구획을 나누고 0.3 mm 간격으로 선 1만 3천여 개로 세밀하고 기하학적인 무늬를 새긴, 그동안 학계에 보고된 적이 전혀 없는 새로운 청동거울이 발견되었기 때문으로 이후 이런 '다뉴세문경'들은 전남 순균 대곡리 마을(1971년),충남 예산군 동서리 마을(1978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반교리 갈동 유적(2007년) 등 한반도 곳곳에서 추가로 발굴이 되었습니다. 다뉴세문경은 북방계 청동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예로 중국보다 먼저 만들어지고 가장 진보한 당시 청동가공기술의 집약체였다 할 수 있습니다.

 

1-1.고조선의 청동가공기술과 제철제강기술

 

고조선의 제철제강기술은 중국으로부터 흘러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사대주의 역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역사학자들은 중국 연나라로부터 철기문화가 수입된 것이라고 말하지만 고조선의 제철제강 기술은 고조선 사람들의 독자적 발명품으로 고조선 시기 연철이 생산된 것은 기원전 2000년기 후반입니다. 철은 자연계에 가장 많고 널리 분포돼 있지만 쓸모가 있으려면 철과 탄소의 합금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고조선 주민들은 처음 연철을 만들고 그것을 여러 번 열처리하는 방식으로 강철을 얻어냈다는 것입니다.고조선에서 연철생산단계를 지나 용해로에서 쇳물을 뽑아내는 단계로 발전한 것은 2000년기 말경으로 황해북도 황주군 고연리 2호 집터(기원전 2000년기 말)에서 나온 쇠 조각과 쇠 슬래그(광물을 제련할 때, 금속을 빼내고 남은 찌꺼기)를 통해 확인됩니다. 이 쇠 슬래그는 이곳에 철광석을 녹이는 용해로가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줍니다.고조선 영역은 아니었지만 고조선의 영향하에서 경제와 문화가 발전했던 함경북도 무산군 범의 구역 제5문화층(기원전 2000년기 말~기원전 1000년기 전반기 유적)에서는 쇠도끼가 발굴됐는데 이 쇠도끼는 완전히 녹은 상태의 선철로 주조된 것이었으며, 제 6문화층(기원전 1000년기 후반기)에서는 강철제품도 발굴됐습니다.

 

 

반응형

 

 

1-2.고조선의 청동갑옷 및 무기류

 

역사학자들이 바라본 단군조선의 상투와 비파형동검,다뉴세문경에 담긴 초정밀기술-5천년전 고조선은 거대문명국이었다 ③

 

 

고조선에서는 연철 및 선철생산에서 쌓은 오랜 경험과 기술에 토대해 기원전 7세기경 마침내 주강기술을 개발 도입하는데 성공했는데 이러한 주강제품은 평북 영변군 세죽리 유적에서 나온 쇠도끼, 요녕성 무순 연화보 유적, 평양일대 나무곽 무덤에서 발굴된 철제 무기 및 공구류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세죽리 부락터 유적에서는 도끼 수십개, 낫 5개, 괭이 3개, 호미 1개가 드러났고 연화보 유적에서는 도끼 60여개, 괭이 1개, 호미 2개, 낫 2개가 나왔습니다. 이것은 고조선 주민들이 기원전 1000년기 전반기부터 주강기술 공학상 선철을 강철로 전화시키는 방법을 일찍부터 파악하고 있었으며, 그와 관련된 기술공정이 줄기차게 이어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또한 고조선 이웃 지역인 구려영역에 속해 있던 자강도 시중군 노남리 유적(기원전 4세기~기원전 3세기)에서는 강철 주조품이 주머니 쇠도끼가 발굴됐습니다.

 

역사학자들이 바라본 단군조선의 상투와 비파형동검,다뉴세문경에 담긴 초정밀기술-5천년전 고조선은 거대문명국이었다 ③

 

이것은 기원전 1000년기 후반기에 이르러 고조선의 제철 제강기술이 이웃 지역인 구려나 부여, 진국지역으로 광범히 전파돼 우리나라 전역에서 주강제품들이 본격적으로 생산됐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주강제품의 생산과 그 광범한 보급은 고조선 국가의 경제와 문화,그리고 군사력을 발전시키기도 합니다.

 

1-3.고조선과 한무제와의 전쟁

 

고조선은 연나라 진개의 고조선 침공으로 2000리 영토를 빼앗겨, 요양하까지 밀렸지만 연 나라의 부흥기를 이끈 진 소왕이 죽은 후 연나라는 급속히 약화됐고, 고조선은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한 투쟁을 펼쳐 패수(대릉하)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그리고 패수를 경계로 삼은 후 약 200여 년 동안 중국(연, 진, 한)과 큰 전쟁은 없었지만 중국 한 무제에 들어서 고조선을 집어삼키려는 야욕으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기원전 109년, 한 무제는 고조선 침공을 결심하고 전쟁 명분을 찾으려고 섭하를 고조선에 사신으로 파견했으며 항복을 강력히 요구하지만 고조선이 크게 반발하자 성과없이 돌아가기 두려웠던 섭하는 국경선인 패수에서 고조선의 비왕 장을 살해하고 강을 건너 도망쳐 버립니다.고조선의 우거왕은 한나라에 이러한 행동에 대한 단호한 보복조치로서 군대를 동원해 불의에 요동군 동부도위를 습격해 살인자 섭하를 처단하게 됩니다.우거왕의 섭하 처단 행동은 고조선이 한나라를 전혀 무서워하지 않을 만큼 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다는 것으로 이런 자신감은 고조선의 제철제강기술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역사학자들이 바라본 단군조선의 상투와 비파형동검,다뉴세문경에 담긴 초정밀기술-5천년전 고조선은 거대문명국이었다 ③

 

결국 한 무제는 섭하 처단사건을 구실로 기원전 109년 가을, 육군과 수군을 대대적으로 동원해 고조선을 전면적으로 침공합니다.누선장군 양복은 약 수군 5만명을 이끌어 나오며 육군 역시 이에 준하는 병력 정도로 최소 10만명에서 12만명 선이었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흉노와의 전쟁에서 공로를 세운 좌장군 순체는 요동(만리장성 동단 끝 안팎)과 연, 대(베이징 부근) 지방의 군대를 긁어모아 패수(대릉하)를 건너 육로를 통해 고조선을 공격했는데 한 무제의 군사들은 여러 해 동안 북쪽의 흉노와 남쪽 남월과의 전쟁에서 많은 전투경험을 축적했기 때문에 고조선을 쉽게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큰 오판이었습니다. 고조선은  한나라의 침략에 대처할 준비를 갖추고 유리한 자연 지리적 조건을 이용해 한나라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한 적극적인 방어전투를 벌였고 한나라의 고조선 침공 전쟁은 한해가 지나도록 결판이 나지 않았습니다.

 

1-4.내부의 배신으로 전투에 승리하고 전쟁에 패배한 고조선

 

역사학자들이 바라본 단군조선의 상투와 비파형동검,다뉴세문경에 담긴 초정밀기술-5천년전 고조선은 거대문명국이었다 ③

 

고조선-한 나라 전쟁은 크게 네 단계로 나뉘는데 첫째 단계는 좌장군 순체와 누선장군 양복의 수륙병진공격을 좌절시킨 시기이고, 두 번째 단계는 강화교섭 시기이며, 세 번째 단계는 한나라 침략군의 내부 알력과 모순을 이용해 왕검성 포위공격을 저지,파탄시키기 위해 투쟁한 시기이며, 넷째 단계는 왕검성을 사수하기 위한 최후 결전을 벌인 시기라 할 수 있습니다.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고조선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결사항전을 지휘하던 성기 장군이 살해 당하면서 전쟁의 승리는 한 나라에게 돌아가게 되는데 표면적으로는 한 나라의 승리였지만 전쟁 결과를 보면 한 무제는 고조선의 서북쪽 일부 지역에 기원전 107년까지 낙랑군, 현도군, 임둔군을 설치했을 뿐이고, 고조선의 대부분 지역은 고조선 군민들이 고수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고조선 전 지역을 장악,지배하려던 한 무제의 전쟁 목표는 실패하고 만것이었습니다.사마천의 사기에 나와 있듯이 고조선은 한 나라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았습니다.이것은 고조선–한 전쟁을 이끌었던 한나라 측 장수들 대부분이 전쟁패배 책임을 물어 사형되거나 서민으로 강등됐다는 사실이 명확히 증명해줍니다. 당시 고조선과 한나라의 군사력은 대등한 상태였고 전투력 역시 고조선이 높았으면 높았지 약하지 않았지만 고조선 통치집단 내부에서 나타난 변절자들의 투항과 배신 때문이며 이는 고구려 멸망 원인과도 일맥 상통합니다.아무리 고도의 문명과 높은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꺽이고 약해지면 그 어떤 전쟁에서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2.함께 읽으면 좋은글

 

2024.02.02 - [고대 한국사의 미스테리/고조선의 역사] - 역사학자들이 바라본 단군조선의 상투와 비파형동검,다뉴세문경에 담긴 초정밀기술-5천년전 고조선은 거대문명국이었다 ②

2024.02.01 - [고대 한국사의 미스테리/고조선의 역사] - 역사학자들이 바라본 단군조선의 상투와 비파형동검,다뉴세문경에 담긴 초정밀기술-5천년전 고조선은 거대문명국이었다 ①

2024.01.31 - [고대 한국사의 미스테리/고조선의 역사] - 역사학자들이 바라본 패수 논쟁 속 패수의 위치-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 경계선 패수는 어디였을까 ③

2024.01.30 - [고대 한국사의 미스테리/고조선의 역사] - 역사학자들이 바라본 패수 논쟁 속 패수의 위치-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 경계선 패수는 어디였을까 ②

2024.01.29 - [고대 한국사의 미스테리/고조선의 역사] - 역사학자들이 바라본 패수 논쟁 속 패수의 위치-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 경계선 패수는 어디였을까 ①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