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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한국사의 미스테리/고조선의 역사

역사학자들이 바라본 단군조선의 상투와 비파형동검,다뉴세문경에 담긴 초정밀기술-5천년전 고조선은 거대문명국이었다 ①

by 캐쉰 2024.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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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고조선 시대의 상투 및 비파형동검,다뉴세문경에 담긴 초정밀기술로 바라본 고조선이 얼마나 거대한 문명국가였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상투하면 우리는 보통 100여년전 조선 사람들의 상투를 연상하기 마련이지만 상투는 이미 고조선 시대부터 해오던 우리 한민족 고유의 문화였다는 것입니다.그런데 상투(Sangtu)를 우리 민족만 해왔다고 생각하면 안되는 것이 상투는 한민족 뿐 아니라 고대 수메르 문명의 바빌로니아, 아시리아의 왕 그림에서 모두 상투가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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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한민족 고유의 상징 상투에 대하여

1-1.전세계 각지에서 발견되는 상투

1-2.스키타이 풍습과 우리의 문신 풍습

1-3.고조선부터 조선시대까지 상투의 변화

 

1.한민족 고유의 상징 상투에 대하여

 

역사학자들이 바라본 단군조선의 상투와 비파형동검,다뉴세문경에 담긴 초정밀기술-5천년전 고조선은 거대문명국이었다 ①

 

燕王 盧綰反, 入匈奴, 滿亡命, 聚黨千餘人, 椎結蠻夷服而東走出塞度浿水, 居秦故空地上下障.

연왕 노관이 반란을 일으켜 흉노로 들어가자,위만도 망명하였다. 그는 무리 천여명을 거느렸는데,상투를 하고 오랑캐 옷을 입었으며,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새를 나와 패수를 건너 진나라의 옛 공지인 상하장에서 살았다.

/한서(漢書) 조선전(朝鮮傳) 고조선(古朝鮮)  

 

 

이 상투는 고대 이집트를 비롯하여 소아시아(고대 터키), 흑해 연안(소그디아 포함), 고조선 모두 상투를 튼 것으로 상투문화는  태양 숭배 사상에서 형성된 것으로 이집트의 피라미드, 지구랏트로 대변되는 고대의 태양 숭배는 곧 하늘을 숭배하는 사상이었으며 오벨리스크란 돌기둥은  우리의 솟대(소도) 문화와 그 맥을 같이 하며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는 사상이었다는 것입니다.오늘날 거석숭배라고 하는 고인돌 세움과 태백(Tebe, Tepe, Tepec, Tebec)의 태양 숭배와 한얼님 숭배는 이집트 , 그리스, 고대 터키, 중앙아시아, 멕시코에 이르기 까지 세계적인 광명사상이었습니다.상투를 튼 사람들은 다른 종족에 비하여 특별한 특징이 있었는데 하나는 편두풍습이 있으며, 천문을 아는 깨우친 사람들이었고, 하늘과 교통하기 위하여 머리 정수리 위에 안테나 구실을 하듯 상투를 튼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입니다.

 

 

1-1.전세계 각지에서 발견되는 상투

 

오늘날 유럽이나 북미에서 사용 중인 상트 , 세인트(Saint)도 모두 상투를 뜻하며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그(Saint_Petersburg)는 약 540 만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발트해의 핀란드만의 머리인 네바 강에 위치한 도시인데 해석하면 “상투-아버지 달의 새 광명 집단”이 됩니다. 미국 풀로리다(Florida-광명의 머리)주에 똑같은 이름인 상트-페테르부르그(Saint_Petersburg)가 있는데 사람들이 북미로 진출하면서 지명 이동을 한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오늘날 Saint 는 ‘St’로 줄여 부르는데 환인 12분국으로 파미르에서 동,서양에 진출하였던 사람들이 모두 검은 머리 사람들이므로 상투 풍습과 편두 풍습은 세계 곳곳에서 볼 수 있게 된 문명이자 지금은 볼 수 없는 앞짱구, 뒷짱구의 인공 두개골 변형(편두)은 풍습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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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스키타이 풍습과 우리의 문신 풍습

 

역사학자들이 바라본 단군조선의 상투와 비파형동검,다뉴세문경에 담긴 초정밀기술-5천년전 고조선은 거대문명국이었다 ①

 

우리의 문신 풍습도 예전에 유행했던 풍습으로 중앙아시아의 스키타이 풍습이 그대로 전해져 온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상투를 튼 뒤에는 갓,문라건,조우관 등 두건이나 모자를 함께 착용하는게 일반적이었는데 조선시대 때는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정수리에서 감아 올린 뒤 동곳 등으로 고정시키고 망건을 써 완성시켰으며 의관을 중요시하는 양반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투를 보이지 않기 위해 평상시에도 상투를 가리는 용도인 상투관을 쓰고 다니기도 했는데 상투관이 절을 할 때 흘러내리지 않게끔 고정하는 방법에서도 여러가지 방식이 있었다고 합니다.나이가 어려도 일찍 결혼을 하여 상투를 틀면 어른 대접을 해주었으며 미혼인데도 어른 대접을 받기 위해 상투를 틀기도 했는데 이런 상투를 외자상투라 불렀습니다. 한동네 살면서 이런 저런 사정 다 아는 동네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안 통했고, 보부상 등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얕보이지 않기 위해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역사학자들이 바라본 단군조선의 상투와 비파형동검,다뉴세문경에 담긴 초정밀기술-5천년전 고조선은 거대문명국이었다 ①

 

또한 관직으로 진출하거나 무과에 급제할 경우 부하들에게 어리다고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상투에서 망건을 두르는 스타일은 조선시대 동안에도 계속 변화했는데 세대마다 유행이 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개인마다 두상차가 존재하므로 같은 시대라 하더라도 인물마다 차이가 있었는데 조선시대에 남아 있는 양반들의 수많은 초상화들을 보면 이마를 거의 덮는 스타일부터 이마를 거의 드러낸 스타일까지 다양한데 조선시대 초상화는 극사실주의로 유명한데, 점 하나 털 하나까지 사실과 똑같이 묘사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1-3.고조선부터 조선시대까지 상투의 변화

 

역사학자들이 바라본 단군조선의 상투와 비파형동검,다뉴세문경에 담긴 초정밀기술-5천년전 고조선은 거대문명국이었다 ①

 

위의 사진에서는 이마를 거의 드러내 놓고 있는데, 구한말 흥선대원군의 예복 간소화 조치의 영향 때문으로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당장 주상인 고종의 의복부터 곤룡포의 용배 사이즈, 소매, 익선관까지 다 사이즈를 대폭 줄였는데 고종의 사진과 영조의 초상화를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확연하다고 합니다. 태조나 영조 등 이전 왕들과 달리 고종은 이마를 거의 까는 수준이 되면서 다른 양반들도 전부 갓 사이즈를 확 줄이고 망건을 높여 이마를 거의 드러내 놓고 다녀야 했다고 합니다.다른 것을 다떠나서 긴 머리카락을 관리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묶는 것인데 우리 선조들은 고조선 시기부터 상투를 틀며 관리해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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