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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한국사의 미스테리/고조선의 역사

역사학자들이 바라본 단군조선의 상투와 비파형동검,다뉴세문경에 담긴 초정밀기술-5천년전 고조선은 거대문명국이었다 ②

by 캐쉰 2024. 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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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포스팅에 이어 역사학자들이 바라본 단군조선의 상투와 비파형동검,다뉴세문경에 담긴 초정밀기술-5천년전 고조선은 거대문명국이었다 ②편에서는 우리에게는 잊혀진 그리고 신화와 전설로만 기억되는 고조선이 문명적으로 얼마나 강대한 국가였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분단국가인 현재의 한국이 한류라는이름으로 문화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우리 민족의 DNA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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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고조선의 의식주-의복

1-1.고조선의 의식주-주식

1-2.고조선의 의식주-주거지

1-3.고조선의 공무도하가

1-4.고조선의 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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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조선의 의식주-의복

 

역사학자들이 바라본 단군조선의 상투와 비파형동검,다뉴세문경에 담긴 초정밀기술-5천년전 고조선은 거대문명국이었다 ②

 

초대 단군왕검이 하백의 딸을 왕후로 맞이하여 잠업(누에치기)을 관장하게 한 기록 (단군세기)으로 볼 때, 고조선 이전 시대 때부터 한민족은 옷감을 생산하는 능력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고학적으로 북한과 만주의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 유적에서 발견되는 양잠의 증거물로 보아도, 고조선은 상당한 직조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고조선 후기 유적인 중국 길림성 후석산猴石山 유적에서 출토된 방직기를 사용하여 짠 마포는 당시의 높은 직조 수준을 보여줍니다. 이 유적에서 또한 옷을 장식하던 청동 단추를 비롯한 여러 치장용품도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고조선 사람들이 옷을 만들어 단추도 달고 다양하게 치장하였음을 보여줍니다.

 

고조선에서는 삼베, 모직, 명주 등의 옷감이 생산되었으며 바느질을 사용한 흔적도 보이는데 고조선 사람들의 바느질 솜씨는 상당히 꼼꼼했다고 합니다. 함경북도 무산군 무산읍 호곡동 범의 구석 8호 집자리에서는 봇나무 껍질을 누빈 것이 발견되었는데 그 솜씨가 쇠바늘을 쓴 것과 차이가 없을 정도로 정밀하였다고 합니다.함경북도 서포항 유적의 고조선 문화층에서는 뼈로 만든 바늘통 안에 바늘들이 보관된 것이 출토되어 고조선 사람들이 바늘을 매우 소중하게 다루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또한 옷을 장식하던 청동단추를 비롯한 치장용품이 발견되는데 당시 사람들이 단순한 옷을 만들어 입은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치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고조선은 의복 제작기술이 발달해 있었고 길쌈하고 옷 짓는 것이 매우 중요한 생활의 일부였다는 것입니다.

 

서포항 침통과 군곡리 뼈바늘 고조선 시대의 복식에 관해서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나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別集)에는 “머리에 개수(蓋首)하는 법을 가르쳤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은 의복의 정제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 고유의 복식이 이때부터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에 의하면 “연(燕)나라 장수 위만(衛滿)이 조선에 입국할 때 추결만이복(椎結蠻夷服)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추결은 고대 우리나라 수식(首飾, 머리 장식)인 상투를 말하며 한서(漢書) 조선전(朝鮮傳)에도 나타나는데 만이복은 중국 복식과는 다른 호복을 착용하고 있음을 표현한 것으로 따라서 고조선의 복식도 한족과는 달리 스키타이계 호복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삼국지 부여전을 보면,“ 부여 사람들은 흰색 옷을 숭상하여 흰 베로 만든 큰 소매가 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었다”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여기에 여우나 흰색 또는 검정색의 담비 털이 붙은 장의를 입었고, 머리에는 금과 은으로 장식된 모자를 썼다."라고 하였는데 이 기록은 부여의 의복 문화를 말한 것이지만, 부여는 고조선을 계승하였으므로 고조선의 복식도 이와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며 복식 문화에서도 백색의 광명 사상을 중시한 한민족의 문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1-1.고조선의 의식주-주식

 

 

고조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직접적으로 알려 주는 기록은 거의 없어 정확히 알길은 없지만 대신 당시의 유물이나 중국의 옛 역사 기록, 또는 고조선 멸망 후에 나타난 부여,고구려,동옥저 등에 대한 기록을 통해서 고조선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후한서에는 고조선의 땅이 오곡을 재배하는 데 알맞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고조선 사람들은 벼,조,기장 ,수수,콩 등을 주식으로 먹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개,돼지,소,말,양,닭 등 가축을 길러 고기를 얻고, 때로는 사냥을 나가 멧돼지,여우,곰,노루 등 산짐승을 잡아 고기와 가죽을 얻었을 것입니다.평양시 남경유적에서 5천 년 전의 탄화미가 한 구덩이 안에서 대량으로 발견되었는데 이 벼의 종자는 현재 우리가 먹는 쌀과 같은 단립종短粒種이며 야생 벼가 아닌 재배종으로 판명되었습니다. 이것은 고조선 이전부터 한반도 땅에 벼농사가 정착되었다는 것을 뜻하는데 고조선 사람들은 벼 외에도 조, 기장, 콩, 팥, 피, 수수 등의 잡곡도 재배하였으며 또한 개,돼지,소,말,양,닭 등 가축을 기르고 사냥으로 산짐승을 잡기도 합니다.또한 한서 지리지에 의하면, 고조선에서는 나무로 만든 그릇을 사용하였는데 고조선 시대 유적지에서 나무 외에 바리, 접시, 굽접시, 시루, 단지, 항아리 등 여러 가지 그릇이 나오는데, 이것은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 먹었음을 말해줍니다.

 

①미송리식 토기 : 평안북도 미송리 동굴 유적에서 발견된 토기로,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입니다.압록강 상류,대동강 유역 외에 요서,요동반도 일대에서 출토

②시루 : 고조선 사람들은 시루를 이용해서 곡물을 쪄 먹기도 했는데 시루의 바닥에는 구멍이 뚫려 있어서 구멍으로 뜨거운 수증기가 올라와 음식을 쪄먹을 수 있었다고 함.

③민무늬 토기 : 토기 표면에 아무런 무늬가 없다는 뜻으로 우리나라 청동기 시대의 토기임.붉은 간 토기와 가지무늬 토기는 무덤 속에 함께 묻거나 제사를 지낼 때 사용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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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고조선의 의식주-주거지

 

 

고조선 사람들은 신석기 시대보다 훨씬 더 규모가 큰 집에서 살았으며 마을도 훨씬 컸을 것입니다.또 함경북도 웅기 지방과 평북 강계, 자성, 영변 등에서 구들의 흔적이 발견되었는데, 고조선 시대의 주거 문화에서 이미 추운 북쪽 지역에서는 온돌을 만들어 난방을 했다는 사실은 한민족 고유의 난방시설인 온돌이 고조선 후기부터 사용되어 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조선 역시 집을 짓고 성을 쌓었는데 집터의 경우 대부분 나무로 만들기 때문에 사라지고 없지만 흔적만은 남아있는데 움집의 형태라고 추정하고 있으며 대전자성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성터의 경우 판축(흙을 단계적으로 다지고 쌓고를 반복하는 방식)방식으로 성을 쌓았는데 이 방식은 진시황릉에서 사용된 방식으로 무려 진시황보다 1,800년전에 이미 우리의 선조들이 판축 방식으로 성을 쌓았다는 것입니다.또한 지가영자 마을의 성터의 경우 현재는 2~3미터가 남아있을 뿐이지만 당시에는 상당히 높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성터의 폭이 4~5미터에 달하며 성터 위에는 마을 사람들이 농사를 지을 정도로 폭이 넓다고 합니다.흙을 중심에 쌓고 양 옆으로 돌을 흙과 함께 쌓은 협축성벽이라고 합니다.이 지가영자 마을의 고조선 성터의 경우 3만평에 달하며 성 안에는 600여기의 집터가 발견되었습니다.

 

오늘날의 가족 구성원보다는 많았을 것이니 최소 6명으로만 잡아도 3,600명이라는 인구가 성 안에서 살았다는 계산이 나옵니다.게다가 이 지가영자 마을의 성 주변에는 여러개의 작은 위성 성터가 발견되어 지가영자 마을의 성의 주인은 매우 세력이 강력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합니다.여기에 더해 고조선은 제정일치 국가이기에 예약 역시 발달했다고 하는데 만주 요령성 조양 하가점하층문화로 불리는 BCE 2000년경 청동기 시대 초기것으로 궁중 음악이나 제사 의례에 사용되는 악기인 석경이 출토되었는데 능원현 삼관전자에서는 편종이 출토되기도 합니다. 또한 두만강 유역에서  BCE 2000년경 전반기의 뼈피리가 발견되면서 동북 아시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예약이 발생해 독자적인 민족적 음악으로 성장했음을 입증해주고 있기도 합니다.

 

1-3.고조선의 공무도하가

 

역사학자들이 바라본 단군조선의 상투와 비파형동검,다뉴세문경에 담긴 초정밀기술-5천년전 고조선은 거대문명국이었다

 

음악으로는 태백일사,소도경전본훈에서 공수,두열이 있었고 어아가는 신시(배달국)의 옛 풍속에 심신을 제사하고 맞이하는 음악으로 신시 이래로 매년 하늘에 천자를 지낸 때마다 나라에 큰 축제를 열어 모두 신(삼신상제)의 덕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며 화합하였다 합니다.일반 백성들도 음악을 즐기고 가무를 즐기었을 거라 추정되는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공후인 또는 공무도하가에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조선의 진졸이었던 곽리자고가 어느 날 새벽에 배를 저어 가는데 머리가 하얀 미친 노인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술병을 잡고 험하게 흐르는 강을 건너려 하였다.그 아내가 따라와 말렸으나 듣지 않고 강물에 빠져 죽었다.
그러자 그 노인의 아내가 공후를 타며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며 노래를 부른 뒤에 그 아내도 물에 빠져 죽었다.
곽리자고가 집으로 돌아와 그 이야기를 아내 여옥에게 하니 여옥은 공후를 타면서 그 이야기를 노래로 만들어 부르고
공후인이라고 하였다.

 

공후라는 악기는 현악기로 중국에서는 서한 무제 때인 BCE 106년에 처음 만들어 진것으로 나옵니다.BCE 106년는 위만조선이 망하기 2년전으로 공후는 공후는 고조선에서 흔한 악기였기 때문에 반대로 고조선에서 서한으로 역수출된 것일지도 모를 일입니다.고조선에서는 공후,비파같은 현악기와 북,석경,편종과 같은 타악기,피리 등의 관악기를 골고루 갖추어 의례용 예악과 백성들이 즐기는 서민 음악이 함께 발달했음을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4.고조선의 천문학

 

역사학자들이 바라본 단군조선의 상투와 비파형동검,다뉴세문경에 담긴 초정밀기술-5천년전 고조선은 거대문명국이었다 ②

 

단군조선 시기 고인돌 무덤의 뚜껑돌에는 천문도가 새겨진 것들이 수없이 발견되었는데 그것들을 살펴보면, 5~6 가지의 서로 다른 크기로 별자리들을 새겨놓았는데, 이것은 근대 천문학의 1~6 등급으로 별의 밝기를 나타낸 별자리 등급과 같은 것으로 단군조선 시기 고대 천문학은 고구려로 계승 발전돼 고구려에서는 세계적으로 우수한 천문석각도를 남겼습니다. 국보 228호로 지정돼 있는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본은 이조 태조 때 고구려 시대 평양에서 각석한 천문도 비석의 탁본을 바탕으로 돌에 새긴 천문도로서, 이것은 고구려의 천문학의 발전 수준을 잘 보여준다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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