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길어져 총 3편으로 나누게 된 역사학자들이 바라본 패수 논쟁 속 패수의 위치-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 경계선 패수는 어디였을까 ③편을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선을 살펴보는 것은 이후 고구려,발해,신라,고려,조선의 명확한 국경선과도 연계되며 고조선 이후의 국가들이 고조선의 강역을 수복했는지 거기에 이르지못하였는지 살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차
1.윤내현의 패수난하설
1-1.연나라에 빼앗긴 2000여리 땅에 대한 오류
1-2.패수가 곧 대릉하
1-3.요동반도에 설치된 한사군
1-4.단재 신채호와 박지원이 개탄한 고조선 영토
2.함께 읽으면 좋은글
1.윤내현의 패수난하설
패수난하설은 국내의 윤내현이 주장한 설로 그에 따르면 난하가 고대의 요수이며, 패수라고 합니다. 이 패수난하설을 이덕일, 복기대, 김종서 등이 지지하고 있으며 이덕일은 조백하설을 덤으로 넣기도 합니다.이렇게 고조선과 한 나라의 국경 경계선으로 중요한 패수에 대해서 여러 설이 난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물론 고대에는 거주지 이동에 따라 옮겨 살기 이전의 명칭을 새로운 정착지의 지명으로 계속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는데 고조선과 한 나라의 전쟁이후로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과 연관된 지명으로 패수는 특정한 하나의 강이 되기도 합니다.
1-1.연나라에 빼앗긴 2000여리 땅에 대한 오류
패수 대릉하설의 경우 부연설명을 하자면,연나라 소왕이 장수 진개를 보내 후조선 서쪽 변방을 치고 2000여리의 땅을 차지하고 만반한을 경계로 삼았다는 기록이 삼국지 한전에 인용된 위략에 나오는데 후조선은 이 전쟁의 결과 2000여리에 달하는 서쪽 영토를 잃고 만반한을 경계로 연나라와 접하게 되는데, 이때 빼앗긴 2000여리의 땅은 당시 연나라의 2000여리는 오늘날의 길이단위와는 다릅니다.오늘날의 잣대로 계산하면 착오가 발생하는데 일부 연구자들은 이러한 오류에 빠져 압록강 또는 청천강까지 고조선이 후퇴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이는 군사학적으로도 불가능합니다. 당시 연나라의 통치력으로 자신보다 몇 배나 큰 지역을 장악 지배할 수는 없었는데 그랬다면 연나라가 소왕이 죽은 후 다시 조그마한 나라로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원전 232년경 연나라가 존재하던 시기
①진나라 사람 감라가 강한 조나라, 약한 연나라라고 한 것(사기 권 71 감라전)
②연나라의 마지막 왕 희의 아들 단이 자기 나라는 판도가 작고 국력이 약하다고 한 것(사기 권 86 자객전)
③진나라 말기 농민전쟁을 계기로 기원전 209년에 연나라를 재건한 이전 연나라 귀족들이 고국을 회고하면서 연나라는 작은 나라였다고 한 것(한서 권 31 진승항적전)등은 연나라의 장성과 그에 따르는 동방에로의 영토 확장이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나라가 압록강 청천강 까지 진출했다는 견해는 성립될 수 없는데 당시 2000여리가 어느 정도의 거리인가는 연나라가 고조선을 침공하기 반세기전에 소진이 당시 연나라 땅이 사방 2000여리에 해당된다고 묘사한 것을 참고하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시 연나라 한변의 길이만큼의 거리를 난하 중류로부터 재어 보면, 당시 연나라가 차지한 고조선 땅은 난하 중류로부터 요하하류(서쪽 요양하계선)에 이릅니다.
연나라 진개의 침공으로 고조선의 서변은 요하하류(요양하) 계선으로 후퇴했지만 연나라 소왕이 죽은 후 연나라는 급속히 약해졌고 이때를 틈타 동호는 다시 빼앗긴 지역을 되찾고 기원전 273년 대지방(베이징 근처)까지 급속히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이 때 고조선 역시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한 투쟁을 펼쳐 패수유역까지 서쪽으로 다시 진출했으며 그 결과 패수가 연나라 고조선의 경계선으로 되면서 그 이후 진한 시대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놓고 보면 패수는 요하 서쪽에 있어야 하며 한서지리지에서 만왕의 구도가 요동군 험독현에 있다는 기사에서도 확인됩니다. 요동군 험독현은 현재 요하의 서쪽에 있으므로 만조선 시기 한나라와 고조선의 경계인 패수는 요하 서쪽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1-2.패수가 곧 대릉하
패수가 오늘날의 대릉하였다는 것은 요동고새와 패수, 열수의 상대적 위치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역사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패수의 서쪽에는 한나라의 요동고새, 동쪽에는 고조선의 열수라는 강이 있었습니다. 즉 패수는 요동고새와 열수 사이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조선 말기 열수는 오늘의 요하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오늘의 요하가 고조선 말기의 열수였다는 것은 ‘요동성이 본래 오렬흘이었다’는 한 삼국사기의 기록이나, ‘요하를 일명 압록수라고도 한다’고 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렬이나 압록은 고대 우리말로 열과 통하며, 따라서 요하를 한 때 열수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진나라 시기 곽박은 방언의 조선 열수에 대해 주석하면서 열수는 요동에 있었다고 강조했고, 산해경에서는 패수가 ‘열도에 흘러든다’고 했는데, 이 ‘열도’를 열수의 하구의 충적지대(니토지대)를 말하며, 이는 열수와 패수가 하구를 가까이 하고 있는 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고조선 말기 열수가 요하이고, 요동고새가 산해관일대에 있었던 만큼 그 사이에 있었던 패수는 대릉하일 수밖에 없다는 주장입니다.또 패수가 오늘날 대릉하라는 것은 패수에 관한 수경의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수경은 중국의 강줄기를 기술한 책인데, 요서 요동의 물줄기를 설명하면서 큰 강의 하나인 대릉하를 서술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패수가 대릉하이기 때문이라고밖에 해석할 수 없는 것으로 만약에 패수가 청천강이나 대동강이라면 압록강 청천강 대동강을 기술하지 않은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1-3.요동반도에 설치된 한사군
그 강들은 중국 땅에 속한 적이 없기 때문에 기술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으며 또 수경에서 묘사된 패수의 강줄기의 모습을 놓고 볼 때 이에 부합되는 강은 대릉하 이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패수의 위치가 오늘날의 대릉하라면 고조선- 한나라 전쟁의 주요 전쟁터가 한반도가 아니라 요동반도이며, 고조선이 패망한 이후 고조선의 옛 땅에 설치한 한사군이 한반도가 아닌 요동반도에 설치됐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1-4.단재 신채호와 박지원이 개탄한 고조선 영토
중국 산해경에는 "동해(황해)의 안과 북해(발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으니 나라 이름을 조선 천독(하늘이 다스리는 나라)이라고 한다.그 사람들은 물가에 살며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패수와 한사군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학설을 의심하게 하는 기록이며 단채 신채호는 평양과 패수는 조선 문명상 중요한 위치인데도 불구하고 지난 1천여년간 그 본래의 위치를 상실하고 1천여리나 이사하여 한 작은 지방인 것처럼 알려졌다고 개탄해 마지 않았습니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우리나라 선비들은 단지 지금 평양만 알고 기자가 평양에 도읍했다고하면 이를 믿고,평양에 정전이 있다고하면 이를 믿으며,평양에 기자묘가 있다고 하면 이를 믿어서,만일 봉황성이 곧 평양이라고 하면 크게 놀랄 것이다.더구나 요동에도 또 하나의 평양이 있었다 하면,이는 해괴한 말이라 하고 나무랄 것이다.그들은 아직 요동이 본시 조선의 땅이며,숙신,예,맥 등 동이의 여러 나라가 모두 위만의 조선에 예속되었던 것을 알지 못하고,또 오라,영고탑,후춘 등지가 본시 고구려의 옛 땅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아아,후세 선비들이 이러한 경계를 밝히지 않고 함부로 한 사군을 죄다 압록강 안쪽에다 몰아 넣어서,억지로 사실을 이끌어다 구구히 분배하고 다시 패수를 그 속에서 찾되,혹은 압록강을 패수라 하고 혹은 청천강을 패수라 하며 혹은 대동강을 패수라 한다.이리하여 조선의 강토는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줄어들었다!
라며 열하일기의 박지원은 한탄하고 있습니다.화하족의 후예들은 동북공정으로 자신들의 땅이 아닌 곳도 자신의 땅이자 역사라고 우기는 판에 배달의 후예들은 선조들의 땅도 원래 우리 땅이 아니었다며 중국에 갖다 바치는 만행을 저지르며 박지원이 한탄한 것처럼 싸워보지도 않고 우리 선조들이 누비며 지켰던 땅을 지켜내지 못하고 있습니다.선조들이 명명백백하게 우리의 땅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뭐가 무서워 의심하고 지레짐작으로 원래부터 대국이었던 중국땅이라 하는 것인지,고조선과 한 나라의 경계 패수에 대하여 생각해본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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