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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한국사의 미스테리/고조선의 역사

고조선의 마지막 왕조 만조선 위만의 정체-그는 중국인이 아닌 조선인이었다 ①

by 캐쉰 2024.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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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고조선의 마지막 왕조 만조선 위만은 중국인이 아닌 조선인이었다!

 

한민족의 고대국가를 형성한 고조선은 단군조선, 후조선, 만조선이라는 세 왕조가 있었는데, 이를 삼조선이라고도 합니다. 기원전 15세기경 단군조선은 내부적 모순의 축적으로 약화 몰락하고, 후조선이 성립하는데 후조선은 단군조선 시기의 영토였던 부여, 구려, 진국 등이 분리 독립해 나가 영토가 축소됐지만, 왕조 성립 이후 신속히 내부 체제를 정비하고, 의무려산맥 서쪽지역(요서지역)으로 광범히 진출해 난하 중류 일대까지 영토를 확장했지만 연나라 소왕 때 장수 진개의 고조선 침략으로 요하 서쪽 지역 2000여리의 땅을 연나라에 빼앗긴 후 나라가 약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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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위만조선의 성립

1-1.위만이 다스린 변방 100리는 패수(대릉하)

1-2.위만은 중국인(연인)이었을까?_옷차림은 조선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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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위만조선의 성립

 

고조선의 마지막 왕조 만조선 위만의 정체-그는 중국인이 아닌 조선인이었다 ①

BCE 108년 당시 고조선 세력도,지도에서 고구려라고 표시된건 삼국시대의 고구려 왕조가 아니라 예맥족의 원고구려 집단이다.

 

 

후조선 마지막 왕인 준왕 때에 이르러 서변의 제후로 있었던 위만에 의해 멸망했는데 이때가 기원전 194년으로 이로부터 후조선 왕조는 만조선 왕조로 구분됩니다. 만조선 혹은 위만조선(衛滿朝鮮)이라 부르는 고조선의 두번째 세습 왕조(기자조선은 허구라 삼조선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위만(衛滿)을 시조로 하며, 사기 조선전(朝鮮傳)과 한서 조선전 등의 중국 문헌 기록에 등장하는 한민족의 고대국가로 대략 기원전 194년에서 기원전 108년까지 존속했습니다.지금의 베트남 일대에 조타가 현지인에 동화되어 세웠다가 한무제에 의해 멸망한 남월과는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성립 정황과 멸망 과정이 비슷하다고 합니다.만조선의 시조인 위만(衛滿)은 연나라(燕) 출신의 사람인 것으로 되어 있으며,사기에서는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한 나라에 반(叛)하다 실패하여 흉노로 도망하자 연나라 사람이었던 위만이 무리 1,000여 명을 모아 동쪽으로 패수(浿水)를 건너 상하장(上下障)이라는 곳에 정착했다고 합니다. 당시 고조선은 비왕의 뒤를 이어 평안도 지역에 정착한 준왕의 시대로, 위만은 요동 태수(遼東太守)로부터 변방을 방어하는 외신(外臣)의 직함을 받았습니다.이에 대해서 위략에

 

연나라 사람 위만이 동쪽으로 취수(패수)를 건너 준에게로 가서 항복했다.
그가 준왕을 설복해 서쪽 변경에 살면서 옛 중국의 망명자들로
조선의 울타리를 삼겠다고 하니 준이 그를 믿고 박사벼슬을 주고 규를 주었으며,
백리땅을 봉토로 주어 서쪽 변방을 지키게 했다.

 

고 나와 있습니다. 이처럼 만은 원래 연나라에 살다가 진승오광의 반란으로 중국 내부가 소란스러워지자 지지자들을 끌고 고조선 땅으로 망명했는데(기원전 209년) 후조선으로 온 만은 준왕의 신임을 얻어 후왕으로 대접을 받으면서 변방 백리 땅을 통치하는 권력을 갖게 됐습니다. 위만이 후조선에 망명하고 준왕에게 받은 서쪽 변경 백리 땅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그 위치는 사기 조선열전에서 전하는 ‘진고공지 상하장’ 즉 패수(대릉하) 동쪽, 요양하 서쪽 지역이며, 후국 수도는 험독에 두었다고 했는데 만이 후조선 준왕으로부터 받은 후국 수도인 험독의 위치가 나온 역사책은 한서 지리지로 요동군 험독현 조에는 응소가 “조선왕 만의 수도이다”라고 했다는 주석이 붙어 있고, 사기색은(당(唐, AD 618 -907)나라 시대 때 유명한 사학자인 사마정(司馬貞)이 쓴 사기 주석서)에는 응소의 주석을 인용하면서 “조선 왕의 옛 수도”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조선왕의 옛 수도라는 것은 고조선(후조선)의 왕으로 되기 전 후왕(제후 왕)으로 있었을 때의 후국(제후국)의 수도라는 의미로 이는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 요동군 험독현으로 된 지역(요양하 서쪽 지역)이 후조선 말기에는 중국이 아닌 고조선의 영토에 속해 있었고, 연나라 당시, 그리고 진나라 한나라 초기의 요동군과 훗날 고조선 멸망 이후의 요동군의 위치가 달랐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1-1.위만이 다스린 변방 100리는 패수(대릉하)

 

덧붙여 만이 후조선 왕으로부터 받은 변방 백리 땅이 요하 이서 패수(대릉하) 이동지역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패수가 대릉하라는 것을 말해주는 유력한 증거이기도 합니다.위만은 후조선 서쪽 변경 100리 땅을 봉지로 다스리면서, 10여 년 동안 자체적인 정치,경제적 군사적 역량을 구축하며, 후조선을 집어삼킬 기회를 엿보고 있었고 드디어 기회가 왔는데 기원전 195년 한나라에서는 연왕 로완의 반역사건이 일어났는데 한나라 중앙정부는 주발을 총지휘자로 하는 중앙토벌군을 파견해 반란을 진압토록 했습니다. 중앙토벌군이 연왕 르완이 다스리던 지역(옛 연나라 땅으로 대릉하 서쪽지역)으로 물밀 듯 들어오자 연나라 땅은 전쟁터로 변하고 수많은 피난민들이 살길을 찾아 후조선으로 넘어왔습니다. 기회를 엿보던 위만은 기원전 194년 사람을 시켜 후조선의 왕 준에게

 

한나라 군대가 10개의 길(방향)로 쳐들어오니 내가 가서 왕궁을 지키겠다.

 

고 거짓보고를 하게 하고 많은 무력을 이끌고 불의에 왕검성(평양)으로 들이닥쳤습니다. 후조선 준왕은 한나라 대군이 접경지대인 연나라땅에 들어와 있는 것이 사실이고, 이 군대가 임의의 시각에 이웃나라를 침공할 수 있기 때문에 허위보고를 믿고 위만이 군대를 이끌고 평양으로 오는 것에 대해 방심하고 맙니다. 위만의 기병대는 며칠 안에 왕검성에 당도해 공격을 개시했으며 방어대책을 치밀하게 세우지 못한 준왕은 허망하게 왕검성을 내주고 부랴부랴 몇몇 신하들과 호위군사들을 이끌고 배에 올라 대동강으로 내려가서 바다길로 진국의 마한 땅으로 도망가 버렸습니다. 이리하여 만은 힘들이지 않고 후조선 왕조를 무너뜨리고 만왕조를 수립하게 됩니다. 이때가 중국 한나라 효혜제 1년(기원전 194년)으로 위만은 중국어(상고 한어)와 고조선의 언어에 능통했고, 주변 사정에 정통했으며, 주위의 진번국,임둔국,옥저 등을 복속시켜 영토의 확장을 꾀한 것으로 보아 상당히 유능한 무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고조선의 마지막 왕조 만조선 위만의 정체-그는 중국인이 아닌 조선인이었다 ①
위만조선

 

 

그렇게 큰 전투 하나 없이 왕검성을 차지한 위만은 스스로를 왕으로 선포했으며 이로써 기원전 194년 고조선의 두 번째 왕조인 후조선은 종말을 고하고 만왕조가 수립됐습니다. 만왕조는 수도를 왕검성에 두었으며, 후조선 시기의 통치체계와 질서를 기본적으로 그대로 유지했는데 만은 기존 정치세력들 가운데서 순종하지 않은 자들에 대해서는 무력으로 진압하고 나라의 정치정세를 안정시키고, 경제를 발전시키고 무력을 강화 발전시켜 나갔으며 얼마지나지 않아 사방 수천리나 되는 큰 나라로 성장했습니다.

 

 

1-2.위만은 중국인(연인)이었을까?_옷차림은 조선인이었다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서는 만왕조를 위만조선이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만왕조를 세운 만왕이 연나라 출신 위만이라고 보았기 때문인데 역사서들에서는 연나라 사람 위만이 고조선에 망명했다고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만은 중국 사람일까? 아니면 고조선 사람일까?이것이 핵심 쟁점으로 위만이 연나라 땅에 살고 있었던 고조선 사람이었다고 추측하는 이유로는 위만이 "상투를 틀었다"와 "오랑캐의 옷을 입었다"가 있습니다. 교과서에 따라 '조선인의 옷'이나 '흰 옷'이나 '만이복'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정확히는 위만이 연나라에서 조선으로 올 때 “상투를 틀고 조선 옷을 입었다(魋結蠻夷服)”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또한 위만은 당시 조선의 정권을 뺏은 이후 국호를 그대로 '조선'이라 한 것으로 보아 위만을 조선인 계통의 자손으로 보기도 합니다. 요즘의 위만 = 조선인설은 고조선의 중심지에 대한 학설 중 정설인 요동 => 평양 중심 이동설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연나라 장수 진개에게 사방 2,000리를 뺏기고 나서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에서 평양 지역으로 이동했다는 것으로 이 이동설을 기본으로, 연나라 장수 진개에게 침략당한 이후 많은 조선인들이 중국에 끌려가거나 연나라와 그 뒤를 이은 진나라의 지배하에 요동 지방에서 지냈는데, 위만이 그들 중 하나였고, 요동 지방의 고조선인들을 이끌고 당시 고조선에 귀순했다고 설명합니다.

 

그 근거로 고조선 ~ 삼한 시절처럼 왕권이 약할 때는 듣보잡이 왕위에 오르면 쫓겨나거나, 내분이 일어나거나 하기 쉽기 때문에 자기 수족을 요직에 앉혀 권력을 강화시키려 할 텐데 현지인들이 높은 관직에 많이 올랐다는 기록도 있고, 고조선의 세력이 약해지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그러니까 위만을 중심으로 해서 이민 세력과 고조선의 결합이 매우 자연스러웠다는 것입니다.만약에 위만을 비롯해 함께 망명했던 세력이 중국 사람들이었다면, 그 당시의 중화적 사고의 흐름으로 볼 때 조선이라는 국호를 그대로 두지 않았을 것이고 백번 양보해서 국호는 내부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그대로 뒀더라도 각종 정치, 사회제도는 반드시 중화적인 것으로 바꾸려 노력했을 것이지만 모든 기록과 유적 유물적 자료들을 종합해 볼 때 만왕조가 중국식으로 사회제도와 문화를 바꾸려 노력했던 흔적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후한의 응소가 한서음의라는 책에서 만조선의 관직제도를 논할 때 “오랑캐들이 관직의 규범을 잘 모르기 때문에 모두 상”이라고 칭했다고 했는데, 이는 고조선의 관직제도가 중국과는 구별되는 고유한 제도였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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