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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한국사의 미스테리/고조선의 역사

역사학자들과 사료가 비정한 단군조선의 수도 위치-고조선의 마지막 수도 왕험(검)성은 북한 평양이 아닌 중국 장단경이다 ③

by 캐쉰 2024.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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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들과 사료가 비정한 단군조선의 수도 위치-고조선의 마지막 수도 왕험(검)성은 북한 평양이 아닌 중국 장단경이다 ②편에 이어 ③편에서는 고조선 후기 수도의 위치 등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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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고조선의 한군현 위치

1-1.단군조선이 옮긴 장단경의 위치

1-2.장단경 위치에 대한 결론

1-3.단군왕검 멸망에 대한 추론

1-4.진개의 침략에 의한 고조선의 수도 이동설

1-5.고조선의 수도는 요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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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조선의 한군현 위치

 

역사학자들과 사료가 비정한 단군조선의 수도 위치-고조선의 마지막 수도 왕험(검)성은 북한 평양이 아닌 중국 장단경이다 ③

 

위서에 "조선현은 전한과 후한 시대로부터 진시대에 이르기까지 낙랑군에 속해 있다가 폐지되었다. 서기후 432년에 조선현의 주민들을 비여현으로 이주시켜 조선현을 다시 설치하고 북평군에 속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낙랑군이 고구려에 의해 축출당하자 북위가 조선현을 비여현으로 옮기고, 북평군에 소속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비여현은 지금의 난하 유역에 있었습니다. 즉, 조선현의 원래 위치가 난하의 동쪽 부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난하를 중심으로 창려지방에서 조선현 즉, 아사달과 낙랑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1-1.단군조선이 옮긴 장단경의 위치

 

①유주의 당장경설

 

삼국유사에 따르면 기자가 동쪽으로 와서 기자조선을 세우자 단군조선은 그 도읍지를 백악산 아사달에서 장단경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허목의 미수기언에는 장단경을 당장경이라고 표시하였으며, "유주에 당장경이 있었으니 고려사에서는 그곳을 단군조선의 도읍지라고 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유주는 창려의 서쪽에 있슴으로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즉, 단군조선이 도읍지를 옮긴 것은 힘의 원리에 의해 기자조선에 의해 밀려났기 때문으로 기자조선이 도읍한 곳은 낙랑군 조선현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백악산 아사달은 낙랑군 조선현에서 그리 멀지 않은곳에 있었을 것입니다. 기자조선은 단군조선의 도읍지에서 단군을 밀어내고 새로운 정권을 세운 것으로 보는 것이 상식에 부합하며 기자가 서쪽으로부터 왔으므로 단군조선은 동쪽으로 옮겨갔을 것입니다.

 

②대능하 금서시설

 

중국의 고고학자 복기대는 대능하 유역을 주목했는데 조양 부근에 금서시가 있는데 1997년 요녕성 금서시 연산구에 있는 고성터에서 임둔태수장이라고 쓴 봉니를 발견합니다.금서시는 지금의 호로도시(중국명;후루다오시)로 서요녕성 서쪽에 위치하는데 복기대는

 

"봉니와 함께 수습된 유물들에 대한 분석결과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해준다.제 3 기층의 제 2단에서 토착문화(고조선)로부터 한문화로 크게 변화를 보이고 있는데 지배계층이 사용했던 유물이 많이 수습되었다. 이것은 지금의 요녕성 금서시 연산구 여아가 태집둔 소황지 지역에서는 제 3기층 후반기인 중국의 전한시대에 와서 한의 지배계층이 많이 이주하여 거주했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즉,이 지역에서는 토착문화인 고조선문화가 있었는데 그 후 한문화가 대거 유입되었다는 것입니다.부근의 고분에서는 고조선 유물인 비파형동검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를 통해,고조선의 영역이 어느지점에까지 이르렀는지 추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③심양 인근 본계시설

 

윤내현 교수는 험독은 검독을 의미하며, 검독은 조선의 옛 도읍지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주장하는데 그리고 이에 터잡아 단군조선의 도읍지로 두 곳의 후보지를 물색하였는데 요사 지리지에 집 주회중군은 지금의 심양시 동남 지역이었다는 것입니다.윤내현은 심양시 동남쪽에 있는 본계시를  지목했는데 본계시에는 조선령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또 대청일통지에 험독 옛 성이 광녕현 동남에 있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이곳은 대릉하 동부 연안에 있는 지금의 북진 근처로 윤내현의 고증에 따르면 장단경은 지금의 본계시나 북진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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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단경 위치에 대한 결론

 

역사학자들과 사료가 비정한 단군조선의 수도 위치-고조선의 마지막 수도 왕험(검)성은 북한 평양이 아닌 중국 장단경이다 ③

 

 

단군조선이 기자조선에 밀려서 비록 도읍지를 옮겼지만, 그 도읍지가 대능하 유역이나 요하 유역 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단군조선의 도읍지는 지금의 요서지역을 크게 벗어난 적이 없으며 낙랑군의 위치도 요서지역에 위치해야 한다든 것이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1-3.단군왕검 멸망에 대한 추론

 

고기에 따르면 단군조선은 장단경에서 다시 아사달로 도읍지를 옮긴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그런데 표현을 살펴보면 “장단경으로 옮겼다가 뒤에 아사달로 돌아와 은거하다가 산신이 되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단군조선이 장단경에 서 멸망하지 않았나하는 추론을 해보게 합니다.단군조선이 멸망한 후,우두머리에 해당하는 단군의 추종자들이 옛 본거지로 돌아왔고, 단군의 사당을 지었다는 상징적인 표현이 아니었을까 여겨집니다.따라서 단군조선은 장단경에서 멸망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1-4.진개의 침략에 의한 고조선의 수도 이동설

 

서울대학교 교수 노태돈은 연나라 진개의 침략으로 고조선의 도읍지가 지금의 요동지역에서 대동강 유역의 평양으로 이동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삼국지에서 인용한 위략에는 전국시대 연나라 소왕(B포, 서기전 312-279년) 때 장수 진개가 고조선을 공격하고 땅 2천여리를 차지하였으며 만번한에 이르러 경계를 삼았다는 기술이 있습니다.만번한은 행정구역인 요동군에 속해 있는 문현과 번 한현을 합쳐서 부르는 명칭이며 요동군은 중국의 동북변경에 있었던 행정구역으로서, 원래는 만리장성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고조선과 연나라의 국경은 사실상, 별로 달라진 것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진개가 빼앗은 땅은 연나라와 고조선 사이의 완충지대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기에 위만이 망명하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패수를 건너 진나라의 옛 공지인 상하장에 거주하면서 세력을 모아 쿠데타를 일으켰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패수 동쪽에 진나라의 빈 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정에 비추어 보면 진개가 고조선을 공격한 것은 국경 방어의 편의를 위해 국경 부근에 살고 있던 고조선 주민들을 소개시킨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진개의 이 공격으로 고조선의 도읍지가 진개에 의해 침탈되었다거나 위협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는 것입니다.

 

도읍지를 옮긴다는 것은 직접적인 위협이 없는 한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개의 공격으로 고조선이 도읍지를 옮겼다는 주장은 근거가 박약한데 이는 삼국사기의 기록과도 부합하지 않습니다. 위만조선의 왕험성이 지금의 요서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점도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하는데 고조선(기자조선)의 도읍지는 위만에 의해 멸망될 때까지 낙랑군 조선현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위만조선은 기자조선의 왕성을 빼앗아 한나라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도읍지를 옮기지 않았는데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은 지금의 요서지역에 있는 갈석산이므로 왕험성은 갈석산의 동쪽지 역에 있었을 것입니다.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도읍지들은 모두 지금의 요서지역을 크게 벗어난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1-5.고조선의 수도는 요하에 있었다

 

역사학자들과 사료가 비정한 단군조선의 수도 위치-고조선의 마지막 수도 왕험(검)성은 북한 평양이 아닌 중국 장단경이다 ③

 

 

단군조선은 서기전 24세기에 지금의 요서지역에 있는 홍산문화 유적지 부근에서 나라를 열었으며 첫번째 도읍지인 평양성과 두번째 도읍지인 백악산 아사달은 모두 홍산문화 유적 즉, 요하에 근접해 있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평지에서 나라를 일으켰다가 나라가 커지면서 방어에 편리한 산성으로 옮겼을 것으로 보이는데 백악산 아사달은 기자조선의 도읍지가 되었다가 위만조선의 도읍지가 되었으며, 후에 낙랑군 조선현이 되었다는 것은 낙랑군 조선현이 갈석산 동쪽, 지금의 요서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기전 12세기에 기자가 동쪽으로 와서 단군조선의 근거지를 장악하고 기자조선을 세우자, 단군조선은 장단경으로 도읍지를 옮겼는데 장단경은 지금의 대능하 또는 요하 유역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은 조선의 적통을 두고 대립한 것으로 보이는데 후한의 왕부가 편찬한 잠부론에 "옛날 주나라 선왕 때 또한 한 후가 있었는데, 그 나라는 연나라에 가까웠다. 옛 시에서 말하기를 '저 커다란 한성은 연나라 군사들이 쌓은 것이다.'라고 노래했습니다.그 후 한(후)나라 서쪽도 역시 성이 한이었는데 위만에게 정벌당해서 바다 가운데로 옮겨 거주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서 한후는 단군조선을 의미하고, 위만에게 정벌당한 서쪽의 한이라는 성을 가진 나라는 기자조선을 의미합니다.이것은 단군조선과 기자조선이 그 뿌리가 같다는 사실과 함께 이들이 상당기간 공존하였음을 말해준다는 것입니다.무엇이 역사적 진실이던간에 우리 한민족의 시원으로 여겨지는 단군조선이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지워지고,강단 사학자들에 의해 훼손되어 우리 이후의 세대들에게서는 단군조선이 역사가 아닌,신화가 되거나 아예 지워질 수도 있기에 중국과 국내 강단 사학자들과의 전쟁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우리가 70여년 경제 발전을 위해 매진해온 사이 고대 역사는 찢기고 상처 입은채 지워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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