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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한국사의 미스테리/고려의 역사

고려거란전쟁에서 서희 장군이 획득한 강동 6주의 진짜 위치에 대한 고찰 ⑤

by 캐쉰 2024. 2.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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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거란전쟁에서 서희 장군이 획득한 강동 6주의 진짜 위치에 대한 고찰 ④편에서는 고려시대엔 맑은 압록강인 鴨淥江과 푸른 압록강인 鴨綠江이 있었고 그 중 고려의 국경이 되었던 압록강이자 강동 6주와 관련이 있는 압록강은 맑은 압록강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 2개의 압록강을 고려사에선 각각 압강(鴨江)과 압록강(鴨綠江)으로 구분하고 있었으며이 맑은 압록강의 정체는 오늘날의 요하라는 사실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서희 장군의 고려 강동 6주의 구체적인 위치를 찾기 위해 그 중 첫 번째로 강감찬(姜邯贊) 장군이 소배압(蕭排押)의 거란군을 크게 섬멸한 귀주대첩(龜州大捷)이 있었던 귀주의 위치를 찾아봤는데 그 귀주의 위치는 평안북도 구성시가 아니라 요령성 철령시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확인했기 때문에 이젠 나머지 5곳의 위치도 확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통주 다음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곳은 1010년 제2차 여요전쟁 당시 강조(康兆) 장군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요 성종 야율융서의 40만 대군을 맞아 분전했으나 끝내 패전했던 통주(通州) 전투가 있었던 통주의 위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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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강조의 통주전투 실제 위치

1-1.강동 6주 대부분은 동녕로에 속했다

1-2.철주가 곧 안시성

1-3.용주의 실제위치

1-4.양규 장군이 지킨 흥화진의 실제위치

1-5.곽주의 실제 위치

2.강동 6주는 요양, 심양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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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강조의 통주전투 실제 위치

 

고려거란전쟁에서 서희 장군이 획득한 강동 6주의 진짜 위치에 대한 고찰 ⑤
배우 이원종이 분한 강조,강조는 반란을 일으킨후 요 성종의 침입에 통주에서 맞서지만 퍄배하고 잡혀 죽음을 맞는다

 

 

통주란 곳은 후에 선주(宣州)로 이름이 바뀌게 되는데 고려사 지리지에서 선주의 기록을 찾으면 이렇습니다.

 

본래는 안화군(安化郡)으로 고려 초에 통주(通州)로 고쳤다. 현종 21년(서기 1030년)에 선주방어사(宣州防禦使)로 칭했다.
고종 18년(서기 1231년)에 몽골군을 피해 자연도(紫燕島)에 들어갔다. 원종 2년(서기 1261년)에 육지로 나왔다. 목미도(牧美島)가 있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는 평안도 의주목 선천군 편에 선주 즉, 통주의 기록을 실었는데 그 때문에 통주는 평안북도 선천군이라는 것이 그간 학계의 통설이었지만 그걸 액면 그대로 믿기에는 석연찮은 점이 많습니다. 강동 6주란 본래 여진의 땅이었으나 서희가 여진족들을 내쫓고 개척한 땅인데 ‘본래 안화군’이란 설명은 이상하기 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귀주와 마찬가지로 본래는 다른 곳에 있었는데 후에 평안북도 선천군이었던 안화군에 선주를 교치(僑治)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려사에는 통주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요사에는 이곳이 동주(銅州)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주라는 지명은 요나라에서만 부른 지명이니 기록에 나온 동주란 곳은 요나라 사람들이 잘 아는 곳일 것입니다. 마침 요사 지리지엔 동주의 기록이 있는데 그 기록은 이렇습니다.

 

동주 광리군(廣利軍)엔 자사를 두었다. 발해가 설치했고 군사 업무는 북병마사(北兵馬司)에 예속시켰다.
거느리는 현은 하나인데 석목현(析木縣)이며 본래 한나라 망평현(望平縣)의 땅이었고 발해는 화산현(花山縣)이라 했다.
초기엔 동경에 예속되었으나 후에 내속되었다.

 

소위 강동 6주란 압록강 동쪽의 땅이며 고려의 안북부와 요나라 동경 요양부 사이에 있었던 곳으로 그 지역에 있는 곳 중에 동주(銅州)라는 지명을 쓰는 곳은 저 동주 광리군밖에 없습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은 이 동주의 위치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나라가 설치했고 금나라가 없앴다. 옛 치소는 오늘날 봉천성 해성현 동남쪽 40리에 있다.
遼置金省故治在今奉天海城縣東南四十里

 

고려거란전쟁에서 서희 장군이 획득한 강동 6주의 진짜 위치에 대한 고찰 ⑤
기존 교과서 속 통주와 사료를 통해 본 통주 실제위치

 

즉, 동주의 위치는 오늘날 요령성 안산시 해성시 동남쪽 40리 지점에 있었다는 뜻입니다.고려사 권 127 열전 40 반역 1에 적힌 강조열전을 보면 강조가 군사를 이끌고 통주성 남쪽으로 나와 군사를 셋으로 나눠 강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으며 강조는 통주 서쪽에 진을 치고 세 강의 합류점에 웅거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즉, 통주는 세 강이 만나는 지점에 있어야 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구글 지도를 보면 해성시 동남쪽 마풍진(馬風鎭) 부근에서 해성하(海城河)와 그 강의 두 지류가 서로 만나고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는데 그 근처엔 산도 많아서 강조가 군사 한 갈래를 나눠 근처 산에 진을 쳤다는 기록도 설명이 됩니다. 또 해성시에서 마풍진은 동남쪽에 위치해 있고 직선거리로 20.4km 지점에 있는데 중국에서 1리는 500m이기에 40리라는 기록도 일치합니다.고려의 통주는 오늘날 요령성 안산시 해성시 마풍진 일대로 보입니다.

 

1-1.강동 6주 대부분은 동녕로에 속했다

 

통주는 이후 몽골에 의해 동녕로(東寧路)로 편입되는데 이곳이 이후엔 동녕부로 이름이 바뀝니다. 원사, 신원사 지리지는 동녕로가 본래 고구려 평양성이었으며 1269년에 고려 역적 최탄(崔坦) 등이 서경의 부, 주, 현, 진 등 60여 성을 몽골에 갖다 바치니 몽골이 그 땅을 동녕로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271년에 동녕부로 이름을 바꿨고 고려와 원나라의 경계를 자비령(慈悲嶺)으로 정했다고 하며 1276년에 동녕로총관부로 승격시켰다고 합니다. 그 때 정주(靜州), 의주(義州), 인주(麟州), 위원진(威遠鎮)을 떼어 파사부(婆娑府)에 예속시켰다고 적혀 있습니다. 원사, 신원사 지리지에 따르면 파사부는 요양로(遼陽路)에 속한다고 했으니 동녕로의 일부가 요양로에 편입된 셈입니다. 그러다가 1290년에 다시 동녕로를 파하고 그곳에 속했던 성들을 모두 고려로 다시 돌려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없어졌던 동녕부는 다시 1370년에 또 등장하는데 이성계가 고려 장군이었던 시절 제1차 요동정벌을 했을 때 등장하는데 학계에서는 이 때의 동녕부를 요령성 요양시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1290년에 원나라가 동녕부를 평양이었던 서경에서 요령성 요양시로 옮겨 설치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사, 신원사 지리지 어디에도 동녕부를 옮겨 설치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1370년에 등장한 ‘동녕부’는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재건한 후 참칭한 이름이거나 부산광역시의 ‘서면’ 또는 ‘조방 앞’처럼 관습적으로 부르던 비공식 지명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동녕부가 고려 역적 최탄이 서경의 부, 주, 현, 진 등 60여 성을 몽골에 갖다 바친 후 설치된 행정구역이니 동녕부의 통치 영역이 곧 서경이 관할하던 범위일 것입니다.

 

1174년 조위총의 난 당시 서경유수 조위총이 금나라에 ‘압록강(鴨淥江) 이동과 자비령 이서’의 40여 성을 들어다 바치며 귀순 요청을 한 것을 보았습니다. 서경의 관할 영역이 곧 압록강 이동과 자비령 이서 지역이고 마침 동녕부 설치 이후에도 고려와 원나라 국경이 자비령이 됐기 때문에 금사에 등장한 자비령과 원사, 신원사 지리지에 등장한 자비령은 같은 곳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압록강이 요하라고 했으니 자비령 또한 황해도의 자비령이 아닌 다른 곳일 가능성이 큽니다. 아마도 천산산맥에 딸린 산들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요령성 요양시가 바로 그 압록강과 자비령 사이에 있는데 다른 행정구역도 많은데 굳이 ‘동녕부’란 이름을 참칭했거나 관습적으로 불렀다면 요양시가 오래 전부터 그 지역을 대표하는 지명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렇게 또 한 번 범위를 압축시켜 보면 다른 지역들의 위치도 한결 수월하게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1-2.철주가 곧 안시성

 

고려거란전쟁에서 서희 장군이 획득한 강동 6주의 진짜 위치에 대한 고찰 ⑤
기존 교과서 속 철주와 사료를 통해 추정한 실제 철주 위치

 

 

철주 귀주와 통주에 이어 찾아볼 곳은 철주(鐵州)입니다.고려사 지리지에 적힌 철주의 기록은 이렇습니다.

 

본래 고려의 장령현(長寧縣)[혹은 동산(銅山)현이라고도 한다.]
현종 9년(서기 1018년)에 철주방어사(鐵州防禦使)라 했다.
本高麗長寧縣[一云銅山]顯宗九年稱鐵州防禦使

 

이 역시 다소 어색한 기록인데 서희가 개척한 곳은 994년 이전까지는 고려 영토가 아니었고 여진족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려의 장령현 혹은 동산현이라는 기록은 뭔가 어색할 수밖에 없는데 결국 이 역시 옮겨진 지명이란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엔 평안도 의주목 철산군 편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기록을 보면,

 

본래 고려의 장령현인데 현종 무오년에 철주방어사로 고쳤다.
本高麗長寧縣顯宗戊午改鐵州防禦使

 

조선의 철산군은 지금의 평안북도 철산군입니다.이 때문에 철주가 지금의 철산군으로 알려졌지만 과연 철산군이 지금의 철주군이 맞을까? 원사, 신원사 지리지에는 철주 관할에 정융진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고려사 지리지에 적힌 정융진의 기록을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현종 20년(서기 1029년)에 유소(柳韶)를 보내 옛 석성을 수리하고 진을 설치했다.
영평성(永平城) 백성들을 옮겨서 실하게 했다. 진은 흥화진의 북쪽에 있다.
顯宗二十年遣柳韶修古石壁置鎭徙永平城民實之鎭在興化鎭北

 

정융진은 흥화진의 북쪽에 있다는 것입니다. 흥화진은 평안북도 의주군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보다 북쪽에 있으면 어떻게 철산군이라는 철주 관할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우선 이 점에서 철주가 지금의 평안북도 철산군이라는 기록은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원사 지리지엔 철주에 대해 주석으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융 1진을 거느리고 있다. 당나라의 안시주(安市州)로 요나라는 동경도에 예속시켰다.
領定戎一鎮唐安市州遼隸東京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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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요사 지리지엔 동경도 관할에 철주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기록을 보면,

 

철주 건무군(建武軍)엔 자사를 두었다.
본래 한나라 안시현이었는데 고구려가 안시성으로 삼았다.
당나라 태종이 이 성을 공격했으나 항복하지 않자 설인귀(薛仁貴)가 흰 옷을 입고 성에 올랐다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발해가 주를 설치했으며 옛 현인 위성현(位城縣), 하단현(河端縣), 창산현(蒼山縣), 용진현(龍珍縣) 4개는 모두 폐지했다.
호수는 1,000호이며 서울 서남쪽 60리에 있다.
鐵州建武軍刺史本漢安市縣高麗爲安市城唐太宗攻之不下薛仁貴白衣登城卽此渤海置州故縣四位城河端蒼山龍珍皆廢戶一千在京西南六十里

 

당나라의 안시주는 고구려 안시성에서 유래한 지명인데 요나라의 철주가 본래 고구려 안시성이었다면 결국 요나라의 철주가 고려의 철주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 기록에 나온 ‘서울’이란 아무래도 동경도 소속이었으니 동경 요양부를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동경 요양부 서남쪽 60리에 철주가 있었던 것으로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철주의 위치를 찾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요나라가 설치했다.
옛 치소는 오늘날 요령성 개평현(蓋平縣) 동북쪽 60리에 있다.
遼置故治在今遼寧蓋平縣東北六十里

 

그 밖에 철주에 대한 기록이 하나 더 있는데 그 기록은 이렇습니다.

 

원나라가 설치했다. 오늘날 조선 평양 서북쪽에 있다.
元置在今朝鮮平壤西北

 

아마 앞의 철주는 요나라 동경도의 철주이고 뒤에 나온 철주는 원나라 동녕로의 철주일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보았듯이 요나라 동경도의 철주가 곧 고려의 철주이고 또 그곳이 원나라 동녕로에 속했기 때문에 조선 평양 서북쪽에 있다는 기록은 당연히 틀린 기록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상으로 볼 때 철주의 위치는 요령성 개주시에선 동북쪽으로 60리, 요양시에선 서남쪽으로 60리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개주시와 요양시 사이에 있는 곳은 요령성 안산(鞍山)시이며 이곳이 철주가 있었던 곳으로 보입니다.

 

1-3.용주의 실제위치

 

고려거란전쟁에서 서희 장군이 획득한 강동 6주의 진짜 위치에 대한 고찰 ⑤
교과서 속 용주와 실제 추정되는 용주 위치

 

 

다음은 용주(龍州)의 위치입니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용주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래 고려의 안흥군(安興郡)이다.
현종 5년(서기 1014년)에 용주방어사(龍州防禦使)를 칭했다.
후에 용만부(龍灣府)로 고쳤다가 충선왕 2년(서기 1310년)에 다시 용주라 칭했다.
本高麗安興郡顯宗五年稱龍州防禦使後改爲龍灣府忠宣王二年復稱龍州

 

이 역시 상당히 부실하기 짝이 없는 기록으로 용주라는 곳은 용만부로 바뀌었다가 충선왕 때 용주로 바뀌었다고 했는데 용만부로 바뀐 시점은 언제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1014년~1310년까지 약 300년 간의 설명이 부실한 셈입니다.이 300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고려의 지명에 대한 설명인데 “본래 고려의 안흥군이다.”는 설명은 상당히 이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이 역시 오리지널 용주의 기록이라 보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를 보면 평안도 의주목 용천군 항목에 용천군이 과거 고려의 안흥군이었다가 용주로 바뀌었고 조선 태종 때 용천군으로 바뀌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용주는 평안북도 용천군이라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고려의 안흥군이 용천군이었을지는 몰라도 용주가 용천군이었다고 볼 수는 없는데 1231년 여․몽 전쟁 당시 기록을 보면 살리타이(撒禮塔)가 이끄는 몽골군이 음력 8월 29일에 함신진(咸新鎭)을 포위하고 철주로 진격했다고 합니다. 함신진은 의주를 말하는데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은 의주 → 철주로 진격한 것입니다. 그리고 9월의 기록을 보면 9월 3일엔 귀주성에서 전투가 발생했고 10일엔 서경, 14일엔 황주와 봉주, 20일엔 용주, 29일엔 선주와 곽주에서 전투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당시 몽골군은 최대한 신속하게 개경으로 쳐들어가서 고종(高宗)의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진로를 그대로 믿으면 남쪽으로 갔다가 북쪽으로 가는 중구난방의 진로를 보이고 있는데 결국 이것은 몽골군이 여러 갈래로 나누어서 군사를 움직였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즉, 살리타이가 이끄는 군대는 의주 → 철주 → 서경 → 황주, 봉주 순으로 진격했고 귀주를 공격한 부대는 또 다른 부대인 것입니다. 고려사 권 103 열전 16 박서열전을 보면 당시 몽골군이 30일 동안 귀주성을 포위하여 공격했으나 박서(朴犀)가 이끄는 고려군이 잘 방어해 결국 몽골군이 못 견디고 퇴각했고 다시 북계(北界) 여러 성의 군사를 몰고 와, 포차 30문을 벌여두고 성곽 50간(間)을 부수며 공격해 왔다고 합니다. 이 사이에 용주와 선주, 곽주 등이 공격을 받은 것입니다. 즉, 이 부대는 귀주 → 용주 → 선주, 곽주 순으로 진격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용주란 곳은 귀주와 선주 즉, 통주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앞서 귀주의 위치를 요령성 철령시 철령현, 통주의 위치를 요령성 해성시의 마풍진 일대로 봤는데 용주는 이 두 곳 사이에 위치해야 합니다. 아마도 지금의 요령성 본계시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그런데 이후 1269년에 고려 역적 최탄 등이 서경 부, 주, 현, 진 60여 성을 들어다 몽골에 갖다 바치면서 본래 안흥군이자 용만부였던 평안북도 용천군에 용주를 교치하면서 마치 강동 6주 중 하나인 용주가 평안북도 용천군이었던 것처럼 인식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1-4.양규 장군이 지킨 흥화진의 실제위치

 

고려거란전쟁에서 서희 장군이 획득한 강동 6주의 진짜 위치에 대한 고찰 ⑤

 

 

다음으로 찾아볼 곳은 흥화진(興化鎭)으로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흥화진은 1030년에 영주(靈州)로 승격되었으며 정융진의 남쪽, 위원진의 동남쪽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융진은 철주 관할의 진이었으니 흥화진은 요령성 안산시 남쪽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 2차 여․요 전쟁을 보면 요 성종 야율융서가 4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가장 먼저 공격한 곳이 흥화진이었는데 양규(楊規)가 이끄는 고려군의 방어에 막혀 통주로 향했다고 합니다. 즉, 흥화진은 결국 압록강과 통주 사이에 있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제 3차 여․요 전쟁 때에도 소배압이 이끄는 10만의 거란군은 흥화진으로 쳐들어왔는데 이 때 강감찬 장군은 기병 1만 2,000명을 뽑아 산골짜기에 매복시킨 후, 동아줄로 소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큰 냇물을 막고 기다렸다가 적이 다가오자 막아 놓았던 물줄기를 터뜨리고 복병을 돌격시켜 크게 패배시켰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로 볼 때 흥화진은 강 하류에 있었던 지역임이 분명합니다.고려사 지리지는 위원진이 흥화진의 서북쪽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역으로 말해 흥화진은 위원진의 동남쪽에 있어야 합니다.

 

원사, 신원사 지리지에 따르면 위원진이란 곳은 정주(靜州), 의주(義州), 인주(麟州)와 함께 동녕로에 속했다가 후에 파사부(婆娑府) 소속으로 바뀌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파사부의 위치는 어디인지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는데 원사 지리지에 따르면 파사부는 요양로(遼陽路)에 속했으며 1288년에 폐지됐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는 파사부의 위치를 오늘날 요령성 단동시 봉성현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과연 그게 사실일까? 요양로에 속한 현은 요양현 하나이고 주는 둘인데 개주와 의주(懿州)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의 위치를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을 통해 찾아보면 요양현은 지금의 요령성 요양시이고 의주(懿州)의 위치는 오늘날 요령성 금주시 흑산현(黑山縣)이라고 하며 개주는 오늘날 요령성 영구시 개주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원사, 신원사 지리지는 파사부가 요양로 소속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기록된 요양로의 위치는 붉은 원으로 표시한 지역인데 이상하게 예하 행정구역인 파사부는 생뚱맞은 요령성 단동시 봉성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그런데 파사부의 위치라고 주장하는 요령성 단동시 봉성현은 유난히 동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데 그런 점에서 본다면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의 기록은 수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파사부에 대한 기록은 고의적인 왜곡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을 듯하며 또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 요양로의 기록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원나라가 설치했다. 지금의 요령성 심양시 이서, 북진시 이북의 땅이다. 요양성에서 다스렸다.
치소는 요양이다. 오늘날 요령성 요양현의 치소이다.
元置今遼寧瀋陽以西北鎭以北地遼陽省治焉治遼陽今遼寧遼陽縣治

 

고려거란전쟁에서 서희 장군이 획득한 강동 6주의 진짜 위치에 대한 고찰 ⑤
양규 장군이 요 성종의 거란군을 7일간 막은 흥화진의 실제 위치

 

 

요양로의 영역은 오늘날 심양시 서쪽이자 요령성 금주시 북진시 이북이라는 것으로 요양로 예하에 속한 곳들을 참고하면 대략 지금의 요양시 서쪽 지역과 심양시 요중(遼中)구, 금주시 흑산현과 안산시, 영구시 일대에 걸쳐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양로 예하에 있는 파사부는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단동시 봉성현에 있다는 건 전혀 납득이 안되며 실제 파사부의 위치 또한 요양로가 있었던 그 범위 안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사부의 위치를 홀로 멀리 단동시에다 떨어뜨려 놓은 것은 아마도 그곳이 우리 역사와 관련이 있는 곳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1356년에 공민왕이 인당(印璫) 등을 보내 압강(鴨江) 이서 8참을 공격하도록 했는데 그 때 인당이 파사부 등 3참을 깨뜨렸다고 고려사에 기록돼 있습니다. 결국 실제 파사부는 압강 서쪽 즉, 요하 서쪽에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앞서 원사지리지에는 파사부가 1288년에 폐지되었다고 했으니 1356년에 등장한 파사부란 곳은 실제 행정구역이라기보다는 앞서 동녕부와 같이 과거 파사부가 있던 지역 일부를 일컫는 말이라고 봐야할 것입니다. 파사부에 속했다는 위원진은 본래 동녕로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파사부가 있었던 곳보다는 더 동쪽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위원진의 위치를 안산시 해성시 북부 지역으로 볼 수 있는데 정확한 위치는 추후 연구가 필요하지만 고타진(高坨鎭), 신대자진(新臺子鎭), 등오진(腾鳌镇) 등이 위원진의 후보지로 꼽힙니다. 흥화진은 그 동남쪽에 있어야 하고 기록으로 볼 때 성 동쪽에 큰 냇물과 산이 있어야 하는 곳으로 흥화진의 실제 위치로 유력하게 꼽히는 곳은 요령성 안산시 대둔진(大屯鎭)이라는 곳입니다. 그곳 동쪽에는 천산산맥이 자리잡고 있고 또 양류하(楊柳河)라는 강이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1-5.곽주의 실제 위치

 

고려거란전쟁에서 서희 장군이 획득한 강동 6주의 진짜 위치에 대한 고찰 ⑤
곽주 실제위치

 

 

곽주의 기록은 너무 부족해서 제대로 위치를 살펴보기는 힘든데. 우선 고려사 지리지엔 곽주의 위치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래 고려의 장리현(長利縣)이다.
성종 13년(서기 994년)에 평장사 서희에게 명해 군사를 이끌고 여진을 공격해 쫓아내고 성을 쌓아 곽주라 했다.
현종 9년(서기 1018년)에 방어사라 했다.
고종 8년(서기 1221년)에 반역을 하여 강등시키고 정양(定襄)이라 했다.
고종 18년(서기 1231년)에 몽골군을 피해 해도로 들어갔다가 원종 2년(서기 1261년)에 육지로 나왔고 수주(隨州)에 예속되었다. 공민왕 21년(서기 1372년)에 다시 군호를 회복했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지리지 평안도 의주목 곽산군 항목에 위의 기록과 똑같은 기록이 그대로 실려 있는데 곽주가 평안북도 곽산군이라는 주장은 여기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곽주는 994년에 여진을 쫓아내고 세운 성인데 ‘본래 고려의 장리현이다.’는 기록은 역시 어색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역시 곽주란 지역이 한 번 옮겨진 지역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즉, 곽산군은 본래 장리현이란 곳이었고 실제 곽주는 다른 곳에 있었는데 모종의 이유로 인해 지금의 평안북도 곽산군에 교치되었고 그것이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곽산군이 곽주였던 것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모종의 이유란 원사, 신원사 지리지에 보이듯이 1269년에 고려 역적 최탄이 서경 부, 주, 현, 진 60여 성을 들어다 몽골에 갖다 바친 사건을 말합니다. 이 때 곽주 역시 동녕로에 편입되었다는 것입니다. 곽주의 경우는 위치를 제대로 잡기가 어렵지만 앞서 1231년 여․몽 전쟁 당시 기록을 보면 몽골군이 선주 즉, 통주를 공격하고 난 이후 곽주를 함락시킨 것을 고려할 때 곽주는 선주와 가까운 지역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리지 수주 항목을 보면 창주(昌州)가 함락된 뒤 그 고을 사람들이 자연도란 섬에 들어가 피신했다가 1261년에 출륙한 후 곽주의 바닷가에 임시로 거처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로 볼 때 곽주란 곳은 바다를 끼고 있는 지역이어야 합니다. 아마도 요령성 영구(營口)시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2.강동 6주는 요양, 심양 일대

 

고려거란전쟁에서 서희 장군이 획득한 강동 6주의 진짜 위치에 대한 고찰 ⑤
강동 6주의 실제위치가 얼마나 조작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강동 6주의 위치를 기록에 따라 상황에 맞게 비정해 보면 대략 요령성 요양과 심양 주변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1370년에 이성계가 요동정벌을 했던 당시 고려가 북원(北元)에 요동을 정벌한 이유에 대해 설명한 글이 있는데 고려사에 기록된 그 글을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요심(遼瀋) 지역은 애초 본국의 옛 영토였으나 사대(事大)한 이래 장인과 사위의 관계를 맺는 바람에
행성(行省)의 관할로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기샤인테무르(奇賽因帖木兒)가 이 지역을 점거해
자신의 소굴로 삼고서 위로는 원나라 조정에 충성을 바치지 않고 아래로는 본국에 공연한 사단을 일으켰기 때문에
지난해에 군대를 파견해 그를 뒤쫓아 습격하게 했던 것이다.

 

이 기록에 등장한 기샤인테무르란 인물은 기황후(奇皇后)의 조카이자 부원배 기철(奇轍)의 아들입니다. 기철이 1356년에 숙청된 후 원나라로 도주해 반란을 일으켰는데 “요양, 심양 지역은 애초 본국의 옛 영토였다”는 기록에 대해 이전 학계에선 ‘옛 고구려 영토’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기존 국사 교과서 속 강동 6주 위치와 강동 6주의 위치를 비교한 지도. 빨간 원이 기존 국사 교과서 속 주장이고 보라색 원이 본지의 주장이다. 기존 국사 교과서 속 강동 6주 위치와 본지에서 밝혀낸 강동 6주의 위치를 비교한 지도. 빨간 원이 기존 국사 교과서 속 주장이고 보라색 원이 본지의 주장이다.(지도 제작 : 굿모닝충청 조하준 기자)

 

하지만 이 시기는 고구려가 멸망하고 무려 700년이나 지난 시점이어서 고구려의 옛 영토를 가지고 요심 지역 영유권을 주장하기엔 너무 무리가 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심 지역이 원나라에 편입된 이유에 대해 “사대(事大)한 이래 장인과 사위의 관계를 맺는 바람에”라고 분명히 명시돼 있습니다. 우리가 ‘장인과 사위의 관계’를 맺은 나라는 오직 몽골 뿐으로 ‘본국의 옛 영토’란 고려시대 때 갖고 있다가 잃은 영토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잃게 된 사연은 앞서 보았듯이 홍복원이 귀주 등 40여 성을 몽골에 팔아넘긴 뒤 심양로에 편입된 사연, 최탄 등이 서경 예하 60여 성을 몽골에 팔아넘긴 뒤 동녕로와 요양로에 분할 편입된 사연이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교차검증을 통해 강동 6주가 한반도가 아닌 요양,심양 일대에 위치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내로 축소하는 작업을 일제에 이어 식만사관학자들이 여전히 자행하고 있는 것,이것은 중국의 동북공정보다 더 무섭고 치가 떨리는 역사왜곡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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