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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한국사의 미스테리

치우천황과 황제 헌원의 10년 탁록 대전의 승패와 중국 동북공정의 실체적 진실_동북아 역사 전쟁 ④편

by 캐쉰 2024.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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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천황과 황제 헌원의 10년 탁록 대전의 승패와 중국 동북공정의 실체적 진실_동북아 역사 전쟁 ④편

 


치우천황과 황제 헌원의 10년 탁록 대전의 승패와 중국 동북공정의 실체적 진실,동북아 역사 전쟁 ③편에 이어서 ④편으로 이어서 마지막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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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황제헌원과 치우천황의 탁록대전의 다른 결말-황제헌원의 승리

1-1.치우천황과 황제헌원의 탁록대전의 다른 결말_치우천황의 승리

1-2.수천년전 자행된 동북공정 금살치우

1-3.동북아 전체에 퍼져있는 치우천황 신앙

1-4.중국 어용학자들이 왜곡한 황제 헌원과 치우천황

1-5.동이족의 영웅이었던 치후천황

1-6.대중문화 속 치우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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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황제헌원과 치우천황의 탁록대전의 다른 결말-황제 헌원의 승리

 

치우천황을 응룡이나 황제가 죽였다는 쪽이 메이저이지만, 마이너하게는 살아서 고향으로 도망쳤다거나 황제 헌원씨의 신하가 됐다고 나오기도 합니다.치우가 죽었다는 설을 대부분 따르지만 '치우가 죽은 후 요마들이 날뛰니 치우의 얼굴을 그려 붙여 그가 살아서 황제 헌원씨의 신하가 된 것처럼 위장하자 조용해졌다'고 나오는 신화도 있는데, 사망설과 생존설의 융합을 꾀한 것으로 보여집니다.치우와 황제의 마지막 결전은 탁록(학술적으로 위치 불명)에서 있었는데, 그 때 황제는 지남거(指南車, 항상 남쪽을 가리키는 일종의 나침반) 를 만들어 안개 속에서도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응룡(應龍)과 자신의 딸인 태양을 다스리는 여신 발(妭)-황제 헌원씨의 딸 발은 후에 가뭄을 부르는 재앙신의 속성을 띠게 되어, 이름의 한자도 妭에서 魃로 바뀌게 된다-까지 총동원하여 치우씨를 쓰러뜨렸다고 전해집니다. 묘족 신화에서는 여신 발의 미인계에 의해 당했다고 나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황제에 의해 토막나서 처형당하는데, 이때 흘린 피가 단풍나무에 스며들어 가을마다 단풍이 붉게 물든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지만 같은 산해경에서의 단풍나무 전설 기록에 보면 치우가 자신을 포박한 차꼬와 수갑을 풀어 버리고 도망쳤는데 그것이 변한 게 단풍나무라는 이설도 나오는데 애초에 산해경은 역사서가 아니라 후대에 수없이 덧씌워진 신화집이라 모순되는 내용이나 현실과 괴리된 내용이 굉장히 많기도 합니다.

 

관자 오행편에 보면 황제 헌원씨가 치우를 得(득, 만나다/얻다로 둘 다 해석 가능)하여 천도를 훤히 알게 되었다는 기록도 나오지만, 염제 신농씨의 자손인 치우 본인이라기보다는 유성을 의인화한 별개의 인물로 보는 데 금속기 주조나 기상 현상의 통제와 같은 면모가 없고, 대신 천도를 아는 현자라서 황제가 관직을 내린 것으로 나옵니다. 일단 황제와 싸운 그 치우가 아니라는 주석이 달려 있지만 본문이 아니라 주석이므로 권위가 떨어지며, 함께 병렬로 언급된 다른 재상들 중 다른 중국 신화의 신들이 있고, 중국 신화에 나오는 치우가 단 한 명 밖에 없기 때문에, 이 치우와 저 치우를 동일 인물로 여기는 경향이 예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한편 지수편에서는 천자가 치우에게 광산을 관리토록 시켰다가 치우가 무기를 만들어 다른 제후국들을 겸병하고 다니자 천자에게 털렸다고 나옵니다. 즉 잘 알려진 탁록대전과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인데 이렇게 한 전집 내에서도 기록에 차이가 있는 이유는 관자가 여러 명의 저자와 편집자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1-1.치우천황과 황제헌원의 탁록대전의 다른 결말_치우천황의 승리

 

황제헌원은 섬서성 지역을 관할 하던 염제 신농씨의 신하였는데
염제 신농을 무찌르고 섬서성을 차지했지만 치우와의 탁록 전투에서 패한 것으로 보이며,
제후들에게 쫓기어 도망다니느라 편히 지낸적이 없었다.

/사기 오제본기

황제 헌원이 천자가 되려다 치우에게 패하여 수염이 뽑히고 활이 땅에 떨어져 있었는데
황제 헌원을 찾을 수가 없었지만 섬서성 북쪽 깊은 산골짝이(延安市 黃陵縣)에 신하들이 황제능을 만들어 주었다.

/사기 효문본기

황제가 치우에게 승리하여 천자가 되었다면 섬서성 북쪽의 깊은 산꼴짜기에 황제능을 만들 이유가 없을 것이다.
치우천왕이 동이족인 소호금천씨를 섬서성 서북부의 유웅국에 보내 황제 헌원의 유웅국을 다스린 것으로 보인다
(소호금천씨는 황제 헌원의 사위로 기록되어 있다) 

/사마천 사기(史記) 卷一 五帝本紀 第一 황제(黃帝) 

 

이에 헌원은 무기 사용법을 익히고, 신농씨에게 조공하지 않는 자들을 정벌하니, 제후들이 모두 와서 신농씨에게 복종하였다.그러나 치우(蚩尤)는 가장 포악하여 정벌할 수가 없었다.당나라 장수절의 정의는 용어하도(龍魚河圖)에서 말하기를

 

“황제가 섭정할 때, 치우에게는 형제 81인이 있었는데 모두 짐승의 몸을 하고서 사람의 말을 하였으며,
구리로 된 머리에 철로 된 이마를 갖고 있었고, 모래와 돌을 먹었으며,병장기로 칼과 창, 큰 활을 만들니 그위세가 천하에 떨쳤다.
공안국(孔安國) 말하길 “구려(九黎)의 임금을 치우라 부른다.는 것이 이것이다."

....헌원은 이내 덕을 닦고 군대를 정돈하고,염제와 판천(阪泉)의 들판에서 싸웠고,세 번이나 싸운 뒤에야 그 뜻을 이루었다....
치우와의 탁록 전투에서 승리한 후 천하에 순종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황제가 쫓아가 정벌하고, 평정한 후에는 떠났다, 산을 파서 길을 뚫느라, (황제헌원은) 편히 지낸 적이 없었다.

於是軒轅乃習用干戈, 以征不享, 諸侯咸來賓從. 而蚩尤最爲暴, 莫能伐. 集解】應劭曰:「蚩尤, 古天子.」 正義】龍魚河圖云 : 「黃帝攝政, 有蚩尤兄弟八十一人, 並獸身人語, 銅頭鐵額, 食沙石子, 造立兵仗刀戟大弩, 威振天下. 孔安國曰:「九黎君號蚩尤.」是也.... 軒轅乃修德振兵, 以與炎帝戰於阪泉之野, 三戰然後得其志.... 天下有不順者, 黃帝從而征之, 平者去之. 披山通道, 未嘗寧居.

/사마천 사기(史記) 卷十二 효무본기(孝武本紀)

 

황제가 용을 올라타자 신하들과 후궁들 70여 명도 뒤따라 용을 탔고,
용은 바로 하늘로 날아올랐다.미처 오르지 못한 나머지 지위가 낮은 신하들이 모두 용의 수염을 잡고 늘어지는 바람에 용의 수염이 빠졌으며 황제의 활도 떨어졌다. 백성들은 황제(黃帝)가 승천하는 것을 우러러 보다가 활과 용의 수염을 끌어안고 대성통곡하였다.

黃帝上騎, 群臣後宮從上龍七十餘人, 乃上去. 餘小臣不得上, 乃悉持龍髯, 龍髯拔, 墮黃帝之弓.百姓仰望黃帝既上天, 乃抱其弓與龍胡髯號.

 

1-2.수천년전 자행된 동북공정 금살치우

 

마천의 사기 주석서 가운데 가장 권위를 인정받는 삼가(三家) 주석(사기삼가주史記三家注)에는 금살치우 내용과는 전혀 다르게 기술되어 있습니다.남송 배인의 사기집해史記集解, 당나라 장수절의 사기정의史記正義, 당나라 사마정의 사기색은史記索隱에 나온 치우천황의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나라 장수절의 사시정의史記正義에는 '치우 군대가 금속 투구를 머리에 쓰고 큰 쇠뇌(큰활) 등 각종 병장기를 갖추고 출전하여 그 위엄을 천하에 떨쳤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사마정의 사기색은史記索隱에는 '관자는 치우가 노산(盧山)의 금(金, 쇠)을 얻어 다섯 가지 병기를 만들었다.','치우가 군사를 일으켜 황제를 토벌했다.'라는 내용이 나옵니다.사마천 사기에 나오는 '치우가 난을 일으켜 황제가 사로잡아 죽였다.'라는 금살치우의 내용과는 전혀 상반되는 기록입니다.

 

동북아 주도권을 둘러싼 배달국 치우천황(자오지 천황)과 중국의 시조 황제 헌원과 탁록대전은 한漢족의 우두머리였던 황제 헌원이 배달국 치우천황과의 전쟁에서 이겨 동방의 진정한 천자(天子, 황제皇帝)가 되려는 욕심에서 군사를 일으켰으며 탁록대전이라는 10년 전쟁 끝에 치우천황이 황제 헌원을 이겨 제후로 삼았습니다. 사마천 사기에 기록된 '금살치우擒殺蚩尤'라는 대목은 정반대로 기록한 것으로 사마천 사기는 황제 헌원을 동북아의 주도권을 쥔 천자(天子)로 만들어 중국 역사의 시작이 동북아의 중심 나라였다고 못 박기 위해 '금살치우'라는 역사 조작을 자행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사게하는데 당시에는 웃으며 넘어갔을 거짓말이 몇천년이 흐른 후에는 거짓이 진실이 되고 진실이 거짓이 되는 모호함 속에 빠져 버리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중국의 동북공정으로 고조선과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말도 안되는 조작이 몇천년 후에는 고조선과 고구려가 진짜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바뀌어 있을지도 모릅니다.우리가 우리 상고사에 무관심하는 동안에 말입니다.

 

1-3.동북아 전체에 퍼져있는 치우천황 신앙

치우천황과 황제 헌원의 10년 탁록 대전의 승패와 중국 동북공정의 실체적 진실_동북아 역사 전쟁 ④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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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경우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붉은 악마 응원단이 치우천황의 문양을 사용하면서 친숙해지기도 했던 치우천황이지만 사실 한국과는 관계가 없고, 그보다는 묘족의 조상신이라는 설이 더 유력하며, 중국 동부 황하 하류 지역의 민간 신앙에서 많이 받들어지는 신이기도 합니다. 묘족 역시 원래 장강 이북에 거주하다가 후대에 남하했다고 합니다. 현재 중국에서는 소수민족 융합 차원에서 치우 또한 '중화삼조'라고 해서, 황제 헌원씨와 염제 신농씨, 치우천황을 중화민족(한족과는 다른 개념임)의 조상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신화시대를 다룬 중국 드라마에서 흔히 치우를 비열하고 사악한 악당으로 묘사하는 통에 묘족 출신 지식인들이 '중화삼조의 한 분을 이렇게 묘사하다니!' 하고 발끈하곤 한다고 합니다.

 

千古奇才横空贤 천고의 세월 영웅 치우천왕은
可堪并论炎黄间 염제와 황제와 더불어 이야기 하리
五兵刑法君始点 다섯 무기와 형과 법이 치우로 시작했으니
九黎生气冲云天 구리 백성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남는도다
席卷中原华夏联 염제와 황제를 누르고 중원을 석권하니
血染江河五千年 5000년 강물을 피로 물들였네
英名不因涿鹿败 영웅의 이름이 탁록 패전으로 말미암지 않으니
老黑石山百花鲜 흑석산 온갖 꽃들 여전히 붉네  

/묘족의 치우만가

 

묘족은 위와 같은 치우만가를 전승해 왔으며, 해마다 음력 10월이 되면 묘족은 치우 제사를 지낸다고 합니다. 이 시를 보면 치우를 숭상하는 묘족들조차도 치우가 황제 헌원씨에게 깨졌다는 것 자체는 인정하는것 같습니다. 묘족 신화에서 치우는 헌원씨에게 패배한 이후 본거지인 동북부로 돌아가 자식들 중 하나에게 남쪽으로 내려가 나라를 세우라 하고, 그 자식이 남하하여 개국하고 묘족의 시조가 되었다고 합니다.(김선자 저, 중국 소수민족신화기행)

 

 

근데 이 과정에서 황제 헌원씨의 제재가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그쪽까지 힘을 실을 여력이 없었다고 보는게 무방할 듯 합니다.다른 지역을 마저 정복하느라 바빴다고 나오며, 황제 헌원씨가 아내를 넷이나 둔 이유가 일거리가 폭주해 사무를 시키기 위해서였다는 기록까지 있습니다. 고대 중국의 관중은 물론이고 당나라 시대까지의 장안과도 꽤 떨어진 지역이니 하나라 이전이면 더욱 외지였을 것입니다.치우, 오래된 역사병(2017, 푸른역사)을 쓴 김인희 박사는 저서에서 치우가 한민족의 조상신은 물론이고, 심지어 묘족의 조상신조차 '아니다'라고 주장하였는데 저자가 실제로 묘족을 찾아가 인터뷰해보면, 지식인 계층에서나 치우를 알 뿐, 근대적 교육을 받지 못한 일반인들은 전혀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묘족의 지식인들이 민족주의적 감정으로, 한족과 대립되는 위대한 조상을 만들고자 치우 신화를 끌어들이고, 묘족의 전설이나 옛 이야기들 중 '치우'와 이름이 조금이라도 유사한 인물이 등장한다 싶으면 전부 치우와 연결지어 역사를 꾸며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김 박사의 저서를 따르면, 묘족의 '치우 신화'라는 것도 곧이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맹획도 마찬가지이지만 일반인 계층에선 이미 신앙이 사멸했을 뿐 조상신으로 섬겨진 역사가 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한국인 중에서도 영화 신과 함께 등으로 유명해지기 전에는 대별왕과 소별왕, 삼신할미 등을 모르는 한국인들도 없지 않았는데 그냥 환인과 환웅, 단군 정도만 유명했지만 대별왕 소별왕 신앙이 없고 유명하지 않았을 뿐, 신화는 분명히 존재했으므로 치우가 묘족의 조상신인지 여부와 비교하기엔 무리라고 할 수 있다)

 

1-4.중국 어용학자들이 왜곡한 황제 헌원과 치우천왕

 

중국 어용학자들은 황제 헌원이나 치우씨를 중화삼조라 하며 실존인물로 포장하기 위해 어용학자들이 여러가지로 소설을 써내고 있습니다.또한 신채호나 정인보, 김교헌 같은 '민족사학자'들도 언급하지 않았던 치우를 뜬금없이 한민족의 기원과 연관시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1990년대에 나타나 2000년대 초 애국 마케팅과 함께 절정을 이뤘습니다.한국의 기록에서 치우를 한민족과 연관지은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 알려진 것은 규원사화이고 가장 대표적인 저작은 환단고기인데, 환단고기는 위서로 취급받고 있으며 규원사화는 논란이 많지만 역시 위서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김인희 박사의 말에 따르면 치우가 한국인의 조상이라고 처음 주장한 이는 박성수인데 1999년 치우연구회 창간호에 실린 민족의 무신, 치우 천황이란 논문에서 “중국의 기록에는 치우가 삼황오제 때 싸움만 좋아하는 말썽 많은 동방의 제후로 기록되어 있으며, 결국에 가서는 정토(征討)당하고 마는 패장으로 왜곡되어 있으나 우리 기록에는 일찍이 환웅의 신시시대에 중국을 정벌한 용감한 장수 왕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경주 안압지 출토 녹유귀면와(綠油鬼面瓦)는 치우인데 이름을 잃어버리고 도깨비로만 기억하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치우를 한민족과 연관짓는 이들의 논거는 사기 등에 쓰여 있는 동이 기록인데, 그저 중국 입장에서 동쪽에 있는 민족들을 '동이'라고 불렀을 뿐(비유하자면 우리가 '서양인'이라고 부른다고 독일과 이탈리아인을 동일 민족이라고 볼 수 없는 것처럼),위에 설명했듯 한반도에는 독립적인 치우 신앙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없고, 현대 이전에 치우에 대한 계승 의식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환단고기 및 이를 따르는 대다수 일부 사람들의 주장에서는 전쟁에서 오히려 치우가 승리했다고 하며, 결국 전쟁은 이기긴 했지만 휴전 비슷하게 마무리되었다는 얘기를 합니다.역시 또다른 위서로 취급받는 단기고사에서는 '治尤'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행적은 중국 신화와 비슷하게 염제 신농씨를 위해 자부선생 밑에서 같이 공부한 동문인 황제 헌원씨와 싸웠다가 패배하지만 그의 손자인 특명이 단군조선의 관료가 된 것으로 나옵니다. 이 治尤라는 이름은 환단고기에서도 등장하지만, 서방을 담당하는 신으로 자오지 환웅과는 별개의 인물로 나옵니다.

 

1-5.동이족의 영웅이었던 치후천황

 

염제 신농은 치우천왕보다 30살 정도 많았고 치우천왕은 황제보다 대략 50살 정도 많았는데 황제 헌원이 태어났을 때 치우는 50살이고 신농씨는 80살 무렵이었다는 것입니다.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고조선도,고구려도 그리고 세종대왕이나 연개소문,이순신 장군,김연아도 모두 자기들 민족이라 우기고 있습니다.천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나면 세종대왕과 연개소문, 이순신이 중국의 신으로 추앙받을지 모를 일입니다.

 

황제헌원과 치우천왕의 탁록 대전은 기원전 3000년대 일어났던 일입니다.한회화족의 동진과 이로 인한 아느계 사람들의 피해를 우려한 한웅은 산둥반도에 군사를 파견했는데 이땐 이미 서해안이 생기면서 산둥반도에 머물게 된 마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이들은 마을단위 생존을 하던 사람들이라 웅족과의 결합을 통해 전투 집단이 된 배달과는 차원이 달랐다는 것입니다.치우는 산둥에 자리잡은 군사령관이었고 이들 집안이 치우씨였습니다. 그 땐 치우천왕이라 부르지 않고 그냥 치우기라고 불렀는데 지금도 깃발은 리더의 의미인데 그때는 군사령관 치우의 무리들을 전부 다 치우기라고 했다는 것입니다.황제가 20살 즈음 전쟁을 시작했고 당시 치우는 70대 였습니다.73번을 싸웠다고도 하고 100번을 싸웠다고도 되어 있는데 모든 전투에서 이기지만 단 한번 졌는데 처음으로 패배한 다음 치우는 죽어버렸습니다.황제헌원과의 수십 번의 싸움 동안 치우 일족은 대부분 죽게 되었으며 치우 자손들이 모두 죽어서 새롭게 치우를 할 만한 사람들이 없었습니다.치우는 모두 81명이었는데 당시 치우씨들 중에서 나온 장군이 81명이었지만 탁록 대전을 통해 모두 죽게 됩니다. 90번 넘는 전쟁들 중에, 한 전쟁에 한명만 죽는 다 해도 피해는 처참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1-6.대중문화 속 치우천황

 

이우혁(2003년 간행)의 판타지 소설 치우천왕기는 치우와 관련된 유사역사학의 주장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논란이 많았으나 애초에 판타지 소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나름대로 수작이라고 평해집니다.작가 이우혁은 규원사화만 참고했다고 합니다. 고우영의 십팔사략에서 보여지는 치우의 모습은 포악하고 잔인한 원시 부족의 족장으로 맹수를 맨손으로 때려잡을 정도로 힘이 세고, 자기 부하들은 잘 대해주지만 반항하거나 저항하는 등 자기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을 냅다 때려죽이거나 물어죽이는 악랄한 괴물같은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황제 헌원씨가 일어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꽤 잘 나갔었지만, 헌원이 염제 신농씨를 굴복시키고 세력을 일원화하면서 맞붙은 탁록대전에서 구리 투구와 무기들로 무장한 병사들은 헌원이 이끄는 맹수부대의 밥이 되었고, 안개도술로 적을 절벽으로 유인한 뒤 낙석으로 때려잡던 18번 전법도 헌원의 지남거로 인해 전부 파훼되면서 헌원의 칼에 의해 목이 달아납니다.그리고 이현세 작가의 천국의 신화 2부의 주인공이자 전 시리즈를 통틀어서 언급이 되고 주인공들에게 영향을 끼치는데 5부의 주인공 가리온은 치우가 쓰던 강궁과 무기(창으로 재달련된 12자루의 칼)를 사용하면서 치우의 환생으로 불리게되고 전생 때와 마찬가지로 여자 문제 때문에 흑화합니다. 6부에선 짝사랑하던 여자를 잃은 위만이 힘을 추구하게 되자 봉인되어있던 멧돼지 악령이 치우의 창술 12초식과 마지막 최강이자 최악의 초식인 동귀어진까지 알려줍니다. 타이완의 상업지 작가 흑청낭군의 한 단편에서는 구릿빛 피부에 팔 여섯개를 가졌으며 노출도 높은 옷을 입은 야성미 넘치는 소녀로 나오는데, 인체를 이용한 신묘한 지남거를 쓰는 황제에게 패배해 성노예 신세가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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