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대 한국사의 미스테리/고려의 역사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서 가르쳐주지 않은 천추태후와 목종에 관한 숨겨진 진실들

by 마음heart 2023. 12. 5.
728x90
반응형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 초반 천추태후와 김치양 그리고 효심 가득한 목종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스토리 전개가 워낙 빨라 몇회만에 천추태후와 목종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미처 고려거란전쟁에서 풀지못한 천추태후와 목종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합니다.드라마 고려거란전쟁에서 가르쳐주지 않은 천추태후와 목종에 관한 숨겨진 진실들은 무엇일까?

 

더보기

목차

 

1.천추태후 헌애왕후

1-1. 태조 왕건의 손녀,고려의 왕비가 되다

1-2. 유일하게 아들을 낳지만 과부가 되다

1-3.김치양과 사랑에 빠진 천추태후

1-4.섭정 태후가 되어 권력의 중심에 서다

1-5.왕위 계승을 노리다

1-6.강조의 난과 천추태후의 말년

1-7.천추태후의 가계

2.천추태후 평가

2-1. 불교에 대한 정책

2-2.경종 사후

3.드라마 속 천추태후

4.함께 읽으면 좋은글

 

1.천추태후 헌애왕후

 

우리들이 흔히 천추태후라고 알고있는 헌애왕후는 고려 왕조의 창업 군주 태조 왕건의 손녀이자 고려 제5대 국왕인 경종의 제3비 그리고 제6대 국왕인 성종의 여동생, 제7대 국왕인 목종의 모후입니다. 더불어 고려 제8대 국왕 현종의 이모이자 사촌누나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금수저 중의 금수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전 아들 목종에게 받은 공식 존호는 '응천계성정덕왕태후(應天啓聖靜德王太后)'이지만 비공식 존호로 관저였던 천추전(千秋殿)에 거처했다고 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천추태후(千秋太后)라 불렸고 현재를 사는 우리들도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사후 제8대 국왕 현종이 올린 시호는 '헌애왕태후(獻哀王太后)'입니다. 남편 경종과 헌(獻)자 돌림 시호를 받았으며 시호를 줄여 '헌애왕후(獻哀王后)'라고도 합니다.

 

고려거란전쟁에서 천추태후 역을 맡은 이민영

 

1-1. 태조 왕건의 손녀,고려의 왕비가 되다

 

천추태후 헌애왕후는 964년 태조의 아들인 추존왕 대종 왕욱과 선의왕후 류씨의 딸로 태어났으며 아버지인 대종과 어머니인 선의왕후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형제자매들과 함께 할머니인 신정왕후의 손에서 자라게 됩니다. 그리고 경종 즉위후에 여동생인 헌정왕후와 함께 사촌인 경종과 결혼하게 됩니다.경종이 헌애왕후와 헌정왕후를 제3비, 제4비로 맞아들인 이유는 황주의 호족인 황보씨 가문의 영향력이 그때까지도 막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2. 유일하게 아들을 낳지만 과부가 되다

 

경종에게는 이미 제1비 헌숙왕후, 제2비 헌의왕후, 그리고 후궁으로 대명궁부인이 있었습니다.그런데 헌애왕후만이 경종의 유일한 후손인 아들 목종을 낳았지만 목종이 태어난지 1년 만인 981년 6월에 경종이 붕어하자 헌애왕후와 헌정왕후의 동복오빠인 성종이 즉위하게 됩니다. 과부가 된 뒤 헌애왕후는 어린 아들과 함께 숭덕궁(崇德宮)에 머물렀는데 이때 동주(洞州) 사람으로 외족(外族)인 김치양을 만나게 됩니다. 헌애왕후는 황주 황보씨이니 김치양이 외족이라는 것은 황주 황보씨와 동주 김씨 사이에 혼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김치양이 스님 모습이었다는 것을 보아 화엄종(華嚴宗) 승려로 추정되는데 헌애왕후가 불교를 적극 지원했다는 점에서 불교 세력 중에 화엄종의 힘을 빌리려던 것으로 보입니다. 황주 황보씨(黃州 皇甫氏)는 화엄종을 지원했으며 1006년 헌애왕후가 발원한 경전의 초교와 중교를 화엄종 승려가 맡았기 때문입니다.

 

1-3.김치양과 사랑에 빠진 천추태후

 

당시 헌애왕후가 바라던 것은 당연히 선왕 경종과 자신의 아들인 목종의 즉위였으며 김치양을 통해 목종의 즉위 세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데 김치양의 유배에 대해서는 둘 사이에 추잡한 소문이 돌았기 때문인데 고려 초기 왕족 간의 치열한 왕위 쟁탈전을 고려할 때 왕위를 노리던 왕족 세력들의 영향으로 헌애왕후가 아이를 가진 것은 아들인 목종 즉위 이후라는 점과 고려 초기 왕실의 권력 쟁탈전을 고려할 때 이 때는 처신을 조심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990년 목종은 '개령군'으로 봉해졌으며 12월 책봉 의례 때 “성종은 조정에서 정치와 교화를 도와라.”는 교서를 내려는데 이는 목종이 성종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공인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997년 성종이 중병에 걸리자 목종에게 왕위를 물려줬으며 헌애왕후의 아들이 목종으로 즉위하면서 '응천개성정덕왕태후(應天啟聖靜德王太后)'로 높여지지만 천추전(千秋殿)에 거처했다고 하여 '천추태후(千秋太后)'라 불렸습니다.

 

1-4.섭정 태후가 되어 권력의 중심에 서다

 

목종이 즉위하면서 김치양은 중앙 정계에 뛰어들었는데 1006년 만들어진 대보적경(大寶積經) 사경 발문에는 김치양의 벼슬이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판삼사(判三司)라 적혀 있었습니다. 상서우복야는 상서성(尙書省)을 관할하며 삼사의 판사, 사는 전곡의 출납 회계를 관할하는 것으로 김치양은 행정권과 재정권을 장악했던 것입니다. 훗날 강조의 정변 때 김치양과 함께 죽은 사람들은 김치양의 친당(親黨)으로 유행간은 목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대량원군의 후계자 선정을 반대했습니다. 천추궁사(千秋宮司)를 맡은 문인위는 황주 인근 장연현(長淵縣) 출신이며 이주정은 헌애왕후의 친속으로 목종 12년에 유배되었는데 전중감(殿中監)이었으며 마찬가지로 고려 계통 패서호족으로 추정됩니다.

 

상서좌복야 이주헌은 동주 토산현 출신으로 삼사의 직임을 맡았는데 김치양이 동주 출신으로 삼사사를 겸한 걸 고려하면 연고로 가까워진 것으로 보이며 고속으로 승진한 것을 보아 목종 즉위의 공신으로 추정됩니다. 동주 토산현 출신인 안소광(安紹光)은 연고를 통해 접점이 생긴 것으로 보이며 무술이 뛰어나고 왕을 추대한 공이 있다는 기록을 보아 근위를 맡은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선휘원(宣徽院)의 판관이었는데 선휘원은 내료(內僚)를 총괄하고 의식(儀式)을 관장하는 관부였습니다. 황보유의는 국왕의 측근 보좌 기구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이는데 헌애왕후 집안인 황주 황보씨라 추정할 수 있습니다.

 

헌애왕후의 친당은 모두 고려 계통 패서호족이었으며 혈통 또는 지역적 연고를 가진 자들로 목종 즉위 이후 헌애왕후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한 명 낳았습니다.

 

1-5.왕위 계승을 노리다

 

1009년 정월 임오(壬午)일[20]에 천추전이 화재로 소실되어 헌애왕후는 거처를 장생전(長生殿)으로 옮기고 목종은 병을 얻어 정무를 보지 못했는데 이때 김치양이 헌애왕후와 자신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목종의 후계자로 책봉하려다 왕위를 넘본다는 말이 나오게 되는데 김치양은 유충정에게 뇌물을 주면서 도와달라고 했지만 유충정은 거절합니다.

 

1-6.강조의 난과 천추태후의 말년

 

유충정은 곧바로 목종에게 봉서를 올려 '김치양이 왕위를 엿보고 있으며 심복을 널리 벌려놓았다'라고 알렸으며 이에 목종은 강조를 불러들이는데 오히려 강조의 정변이 일어나 김치양 부자와 유행간을 포함한 7명은 죽고 나머지는 귀양을 가게됩니다. 헌애왕후는 목종과 함께 폐위되었으며 아들 목종과 함께 충주로 가던 도중 목종은 적성현에서 강조가 보낸 부하들에 의해 시해 당하고 맙니다. 결국 헌애왕후는 홀로 황주(黃州)로 갔으며 그곳에서 21년을 생활하다 말년에 개경으로 돌아와 1029년 숭덕궁에서 66세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무덤은 개성에 있는 유릉입니다.살해당한 목종과 달리 헌애왕후는 어떠한 위협도 없이 말년은 조용히 살았던 듯합니다.

 

드라마 천추태후에서 채시라

 

 

반응형

 

 

 

 

1-7.천추태후의 가계

 

①친할아버지이자 외할아버지: 고려 태조 왕건

②친할머니: 태조의 제4비 신정왕후

③외할머니: 태조의 제6비 정덕왕후

④아버지: 대종 선경대왕 왕욱

⑤어머니: 선의왕후 류씨

⑥친오빠: 고려 제6대 왕 성종

⑦여동생:고려 제8대 왕 현종의 모후인 헌정왕후

 

천추태후는 태조의 손녀였음에도 할머니의 성 황보씨(皇甫氏)를 따랐는데 초기 고려 왕실은 남매간 근친혼을 하면서도 일단 명목상은 같은 성씨의 결합을 피하려고 왕족 여성은 왕씨가 아닌 어머니나 할머니 쪽 성씨를 따르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왕족들의 모계, 즉 각 지방에 근거한 유력 호족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효과도 있었습니다.

 

경종은 신명순성왕태후의 아들과 신정왕후의 딸의 아들이고, 헌애왕후와 헌정왕후는 신정왕후의 아들과 정덕왕후의 딸의 딸들이므로 경종과 헌애왕후와 헌정왕후의 혼인은 친사촌(삼촌 광종)/고종사촌(고모 대목왕후)/외사촌(외삼촌 광종)간의 혼인이었습니다. 게다가 부모끼리도 다 이복이 아니라 경종의 어머니인 대목왕후랑 헌애왕후의 아버지인 대종은 친남매 간이었으며 양쪽 사돈 안팎 어른들 모두 형제자매에다가 2명은 아예 친남매였던 셈입니다.

 

2.천추태후 평가

 

헌애왕후와 아들인 목종의 위신은 바로 다음 국왕인 현종의 정통성 문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조선시대 고려사편찬 이전, 당대 고려가 남긴 기록에서부터 곡필이 있었을 개연성이 농후합니다. 고려사 등의 사서에서는 헌애왕후를 김치양과 사통하여 왕실과 나라를 어지럽힌 음탕한 여인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이는 당시 고려의 도덕을 무시하고 조선의 성리학적 관점과 이전 왕조를 폄훼하려는 사관에 기초해 이루어진 왜곡된 평가라는 비판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팔관회나 연등회를 폐지하는 등 유학의 정치 이념을 강조했던 성종에 맞서 전통 사상을 강조하고 서경을 중시하는 등 북진 정책을 수호하려 했던 여걸로 재평가하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되기도 했지만 이러한 해석은 '유학은 사대주의, 전통 사상은 자주적 민족주의'라는 지나치게 단순한 이분법적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다른 학계의 비판이 존재합니다.

 

남아있는 기록을 보면 현종은 10대를 막 넘긴 어린 나이에도 이미 왕위에 욕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매번 헌애왕후로부터 생명의 위협에 시달리면서도, 헌애왕후를 두둔한 것을 보면 기가 찰 노릇인데 물론, 현종을 강조의 정변으로 원치 않게 즉위한 무고한 이로 포장해야 하니 목종은 어머니 헌애왕후에 의해 허수아비가 된 유약한 임금으로, 헌애왕후는 불타는 권력욕으로 아들인 목종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외간 남자와 간통을 저지르며 온갖 악행으로 나라를 어지럽히다 최후에는 아들 목종을 폐위당하게 만들고 죽음으로 몬 원인이 된 사악한 악녀로 만들어야 했을 것입니다.

 

유교적 이념을 국시로 삼은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여자가 정치에 참여해 권력을 휘둘렀다는 점, 외간 남자와 사통했다는 점으로 인해 부정적 시선이 더욱 강해졌고 따라서 그 어떤 역사서에서도 헌애왕후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내용은 찾아보기 힘든데 정도전의 경우 "헌애왕후가 음란해 김치양과 간통해 아들을 낳았다. 왕이 애초부터 이것을 제대로 바로 잡지 못해 결국 모자가 모두 재앙을 입었고 사직을 완전히 무너뜨렸다."며 비판했고 안정복도 동사강목에서 아래와 같이 비판하였습니다.

 

지어미로서 음탕한 행동이 있거나 신하로서 반역하는 뜻이 있다면 이는 강상을 무너뜨리고 천리를 어지럽히므로 반드시 죽여야 할 적인 것이다. 황보씨가 김치양과 간통하고서 어찌 태후의 호를 가질 것인가?

/동사강목 현종 20년(1029)

 

 

현대에 들어 그녀에 대한 긍정적 재평가로 목종 재위 도중의 업적을 섭정을 맡은 헌애왕후의 공으로 돌려야 된다는 말도 나오나 목종은 재위 초기부터 스스로 친정을 했고 재위 중반까지 보여준 정치적 행보와 업적은 상당한 수준으로 여요전쟁 승리에도 일정 부분 기여했습니다. 목종이 헌애왕후에 의해 휘둘리는 상황이 아니었으니 헌애왕후가 목종을 압도하는 권력을 쥐었다는 통념을 부정하기 이전에 목종이 유약한 왕이었다는 통념부터 극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기록들을 보면 목종과 헌애왕후의 권력 구도에 대해 많은 의문을 가지게 되는데 애초 현종의 암살을 여러차례 시도한 자신의 모친 헌애왕후를 막는 것에만 급급했던 것이 목종의 실책으로 즉, 자신의 왕권 유지를 위해 다다익선으로 모계의 지원을 받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애초 세력이 약해 왕권에 위협이 되지 못하던 황족에 대한 암살 시도를 원천적으로 차단하지 못해 유약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1. 불교에 대한 정책

 

헌애왕후의 본관인 황주는 화엄종을 믿었고 헌애왕후의 아버지 대종은 선종(禪宗) 광자대사를 흠모해 그 제자가 될 정도로 선종을 선호했고 황주 승려 균여는 화엄종을 중심으로 유가종(瑜伽宗)을 포섭하기를 원했습니다. 성종은 최승로의 건의를 수용해 팔관회와 연등회를 폐지하는 등 불교와 토속 신앙을 억제했지만 최승로 사후 전통 중심으로 회귀했습니다. 부모의 기일에 사원에서 분향하고 서경에 종종 행차해 재제(齋祭)를 지냈는데 성종 9년 12월 한언공에게 요청해 송 황제에게서 대장경 2500권을 받았습니다. 성종 10년 4월 귀국해 대장경을 바치자 승려를 초빙하고 사면령을 내렸으며 목종에게 양위한 뒤 내천왕사로 옮겨 38살에 사망합니다.

 

이런 후기 성종의 종교 정책은 헌애왕후의 뜻도 일정 반영된 것으로 태조와 정종에서 시작된 서경 중시 정책은 성종 후반부터 시작되어 목종 때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목종 원년 7월 호경(鎬京)으로 개칭하고 호경에 4회 행차해 재제를 지냈는데 호경에서 팔관회가 열렸을 가능성이 있으며 목종 12년 개경 정변 당시 왕은 상정전(詳政殿)에서 연등회를 연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연등회와 팔관회가 부활했음을 보여줍니다. 목종 2년 7월 진관사(眞觀寺)가 성남(城南)에 헌애왕후의 원찰, 3년 10월 숭교사(崇敎寺)가 목종의 원찰로 창건되고 10년 2월 진관사 9층탑이 건립되었습니다.

 

이는 선덕여왕이 삼국통일을 기원해 만든 황룡사 9층탑과 왕건이 후삼국통일을 기원해 평양성에 만든 9층탑을 헌애왕후가 이어받아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고 이상의 나라를 만들고자 한 염원이 있는 것으로 진관사는 화엄종, 숭교사는 유가종(법상종) 계열이었습니다.

 

헌애왕후와 김치양은 목종 9년 7월 대보적경(大寶積經)의 글씨를 금으로 필사한 고려국 금자대장경 대보적경을 편찬했습니다.고려 말 왜구가 약탈해 일본에 남아있는데 헌애왕후와 김치양이 발원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연월 글 쓴 사람과 함께 초판을 쓴 승려는 화엄종이었습니다. 헌애왕후는 ‘보살계 제자’니 보살계(菩薩戒)를 받았는데 헌애왕후와 김치양은 금자대장경을 베꼈다는 것으로 보아 권32뿐만 아니라 대보적경 전부와 다른 사본도 필사한 듯 보입니다. 대보적경은 대승불교의 여러 경전을 하나로 묶은 경전으로 49첩 120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대보적경은 밀교사상이 농후해 헌애왕후와 김치양이 밀교적 성향이 강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남아있는 사본인 대보적경 권32가 대보적경 제11출현광명회(권30~34)의 일부라는 점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서방정토와 아미타불 신앙은 물론 반야보살, 문수보살, 미륵보살 신앙에도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또 대보적경에는 여자 신도의 신앙에 대한 내용도 많습니다. 헌애왕후와 김치양의 대보적경 사본은 목종 5년 무렵에 수태해 아기의 건강한 출산을 기원하기 위해, 산후에는 아기의 성장과 장래성공을 기원하기 위해 진행된 것으로 보입니다. 목종 10년 개경 총지사에서 "일체여래심비밀전신사리보협인다라니경"이 간행되었습니다. 삼세여래의 전신사리가 모두 보협인다라니에 함축되어 있으니 이를 간직한 보협인탑을 만들면 모든 부처의 보호를 받게 되는데 이는 총지사 주지가 보협인다라니경을 불탑 안에 안치해 공양하기 위해 보협인경의 사본을 제작하고 찍은 것인데 이 경전판의 제작은 초조대장경의 탄생에 기여했습니다.

 

 

2-2.경종 사후

 

헌애왕후의 관저는 '숭덕궁(崇德宮)'이었는데 아들 목종은 즉위 전, 성종에게 '숭덕궁 적자(崇德宮 嫡子)'로 불렸습니다. 이후 태후가 된 헌애왕후의 새 관저는 그 유명한 본궐 내 천추전(千秋殿)으로 헌애왕후가 천추전에서 김치양과 대놓고 사통하여 김치양의 관저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강조의 정변 이후 자신의 고향인 황주로 갔다가 다시 개경으로 돌아와 숭덕궁(崇德宮)에서 죽었습니다. 천추태후는 숭덕궁에서 출발해 숭덕궁에서 죽은 것이었습니다. 최사위 묘지명엔 여후(呂后)란 명칭으로 등장하는데 헌애왕후를 한고조 유방의 황후인 여태후에 비유한 것으로 헌애왕후를 비난하려고 한 것입니다.

 

고려사 이자겸 열전에 따르면 헌애왕후의 관저는 먼 후손인 인종에 의해 다시 언급되는데 자신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인 이자겸의 관저를 정해줄 때 부의 이름을 숭덕부(崇德府)로 한 것으로 위에도 언급했듯이 헌애왕후의 관저는 김치양의 관저로 취급되기도 했는데 인종이 싫어했던 이자겸을 엿먹일려고 일부러 안좋은 유래를 가진 이름을 준 것입니다. 정작 이자겸은 이를 몰랐는데, 워낙 오래된 일이라 인종과 같이 왕실 내부의 역사를 속속히 아는 사람이 아니면 알기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인종이 이자겸의 사병을 숭덕부군(崇德府軍)이라고 부른 기록도 남아있는데 동사강목(東史綱目)에는

 

"어머니 황보씨를 높여 왕태후(王太后)로 삼고 함께 청정했다."고 나오는데 즉위 당시 목종의 나이가 18세였다는 점과 초기 목종의 활동이 활발했다는 점에서 헌애왕후가 섭정이 아닌 청정을 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습니다. 청정은 임금의 뒤에서 발을 내리고(수렴) 신하들의 의견을 듣는(청정) 수렴청정(垂簾聽政), 동궁(東宮)이 대신 듣는 대리청정(代理聽政)과 같은 명칭으로 섭정(攝政)과는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섭정 제도는 여후가 임조칭제(臨朝稱制)를 한데서 비롯되었는데 조회에 참석하고 황제의 명령과 같이 황태후의 명령을 제(制)라고 한 데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러한 임조칭제는 고려 헌종의 임조칭제를 맡았던 고려시대 모후의 섭정을 칭하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명분부터 모후가 임금을 대신하는 임조칭제와 선왕의 후비로서 임금을 보좌하는 것으로 달랐고 임금과 청정 대상이 특정 날짜에 동행해 조언하거나 반문하는 형식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막후정치와 후비의 청정은 정전에 가는 일은 드물고 평시에는 신하들과 임금의 논의를 듣고 결정하거나 정전(正殿)과 자전(慈殿)을 오가며 하인이나 문서를 통해 결정하는 막후정치였습니다. 천추전에서 청정을 했다는 것은 임조칭제보다 수렴청정에 더 가까운 형태였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데 수렴청정의 경우 전면에 나서는게 아니라 자신의 거처에서 막후정치를 펼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강조의 정변으로 인해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헌애왕후는 정사에 직접 관여한 것 치고는 의외로 세력이 매우 약한 편이었는데, 이에 섭정이 아닌 어머니로서 왕을 도와주고 이런저런 사회 활동을 한 수준이 아니였겠냐는 설도 존재합니다.

 

3.드라마 속 천추태후

 

2009년 KBS2 드라마천추태후에서는 배우 김소은이 연기한 어린 시절(2화~8화) 헌애왕후의 모습은 츤데레에 가까워서 나름대로 인기를 얻었으며 배우 채시라가 연기한 성인 시절은 고려를 지키기 위해 거란과 맞서 싸우고 정치 전면에 나서는 등 의로운 모습이 돋보이는데 섭정을 나선 이후 아들 목종의 업적을 거의 다 가져온 데다 김치양과 애인 사이가 된 후에도 매우 떳떳했으며 어린 시절 현종의 머리를 깎아서 절로 보냈는데 "미워서가 아니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조카니 말이 안 되는 건 아닙니다.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왕위에 올리자는 각종 유혹도 번번히 거절했으며 김치양의 반란과 강조의 정변때에 어쩔 수 없이 김치양을 자신의 손으로 죽였으며 태후 시절에도 나라를 잘 다스려 비록 김치양과 강조의 분쟁때문에 나라의 혼란이라는 결과를 초래했으나 그 잘못을 인정하고 스스로 왕권을 차기 국왕인 현종에게 넘긴 후 말년의 에피소드가 다뤄지기도 합니다. 

 

4.함께 읽으면 좋은글

 

 

2023.12.01 - [고대 한국사의 미스테리] - 미국의 역사학자들이 직접 연구 정리하고 중국의 역사 왜곡 동북공정을 반박한 한국 고대사 기록_한국은 동아시아의 로마제국이었다!

2023.12.02 - [세계사 미스터리] - 고려거란전쟁 속 거란은 과연 어떤 나라였을까?우리가 알던 야만족은 잊어라!

2023.12.04 - [고대 한국사의 미스테리] - 넷플릭스 1위 대하드라마 고려거란전쟁 속 숨은 명장 양규 장군과 흥화진 전투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