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전편 신화와 역사의 경계에서 잠든 한민족 고대사 고조선,중국 동북공정과 국내 주류사학자들에 의해 지워진 단군조선 ②편에 이어서 ③편에서도 고조선 관련 이야기를 풀어보겠습니다.
목차
1.기자조선을 한민족의 시작으로 삼는 이유와 문제점
1-1.고조선의 후예 부여에 대한 짧은 단상
1-2.고조선의 후예 부여에 대한 동북공정
1-3.부여의 고고학적 문화로 바라본 한민족과의 상관관계
1-4.역사 전쟁에서 이미 지고 들어가고 있는 우리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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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자조선을 한민족의 시작으로 삼는 이유와 문제점
동북공정 전후로 기자조선과 관련된 논의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기자조선의 초기 위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은 여러가지 학설을 제시하고 있는데 기자가 요서지역에 기후국을 세웠으며 그 후 기원전 4세기 후반경에 요동지역에서 기후국이 조선국으로 개칭되었으며, 이후 연의 침략으로 평양으로 그 중심을 옮겼다는 설과 하북성과 요동을 거쳐 평양으로 이동했다고 보는 설 등 기자조선의 위치는 고조선의 세력범위 및 중국 동북지역과 한반도 서북 지역의 고문화 주체 등의 해석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도 합니다.중국은 이렇게 동북공정을 통해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이 모두 중국의 지방전권이라는 견해를 제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기자조선과 위만조선과 중국의 대외관계의 성격에 집중하는 연구가이루어졌으며 이 역시 여러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고조선과 춘추시대 제와의 관계는호간의 무역관계로 보았습니다.위략에서 고조선이 중국왕실을 존중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조선후,제후의 신분이었다고 본다는 것입니다. 또한 고조선과 한의 관계에서도 위만이 고조선의 왕권을 장악한 이 후 한과 외신을 맺었는데 한무제는 위만이 외신의 의무를 지키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고조선을 공격하여 사군을 설치하였고 따라서 고조선이 한의 직접적인 군현 통치의 대상으로 편제되었다고 보았습니다.당시 한은 내부적으로 제후들의 반란과 숙청이 있었으며 한고조 사후에 정국이 매우 불안하였고, 대외적으로는 북방의 흉노와의 대치상태에서 관심을 북방 이외의 변경으로 돌릴만 한 여유가 없었다는 것입니다.따라서 위만은 이러한 국제관계에서 외신의 지위를 수락하는 조건으로 막대한 재물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며 이를 통해 진번, 임둔 등 주변국을 복속하여 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국내외적 상황에 대한 이해 없이 외신이 갖는 외형적 의미만을 강조하는 중국학계의 견해는 위만 조선이 기자조선을 이어서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다분히 단선적이고도 일방적인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1.고조선의 후예 부여에 대한 짧은 단상
고조선의 문화를 이어받은 국가로 보통 고구려를 연상하지만 그전에 부여라는 국가가 이미 존재했습니다.물론 고구려의 추모왕이 다물을 국시로 내세운 이유는 부여가 문화적인 부분은 상당부분 고조선의 뒤를 계승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고조선의 영토 회복에서는 미흡했기에 추모왕은 고구려를 건국하며 옛 땅을 회복하려는 다물을 국시로 내세운 것이라 여겨집니다.고조선의 뒤를 이은 부여 명칭의 기원에 대해서는 산해경 등을 근거로 동북공정 이전에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었지만 최근에는 언어학적인 근거로 부여가 맥족이라는 견해가 제시되었습니다.그러나 삼국지 부여전을 보면 부여가 예족이라는 것이 명백한데 발음이 유사하다고 해서 부여를 맥족으로 이해하는 것은 수긍하기 어렵기도 합니다.또 다른 학자는 부여가 중국 남부 오나라에서 기원했다는 견해를 제시하면서 오나라가 망한 후에 그들이 예맥의 땅으로 들어가서 부여가 성립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이역시 부여 지역에 오나라 문화의 흔적이 전혀 없으므로 둘을 바로 연결시키기는 어렵다 할 수 있습니다.부여를 비롯하여 북부여,동부여의 관계 및 왕성의 위치의 경우 사료상에 부여 외에도 북부여, 동부여가 더 있어서 그 실체를 이해하는데 매우 혼란스러운데 이 중 동부여는 아예 한국측 사료에만 나타난다는 점에서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1-2.고조선의 후예 부여에 대한 동북공정
명칭에 관해서는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보는데 일단 부여와 북부여를 동일한 것으로 보고, 동부여를 따로 떼어서 이해하는 방법으로 대체로 요령성 연구자들의 주장으로 후기 중심지를 요령성 북부로 비정함으로써 부여사를 요령성 내로 끌어들이려는 의도를 보여줍니다.다른 한가지는 부여와 북부여를 별개의 실체로 보는 방법으로 대체로 흑룡강성 연구자들의 주장으로 초기 중심지를 흑룡강성 내로 비정하기도 합니다.마지막 세번째는 세 개의 부여를 모두 동일한 실체로 파악하는 방법인데 주로 길림성 연구자들의 주장으로 전기 중심을 길림시 일대로, 후기 중심지를 농안 일대로 비정하여 중심지를 길림성 내에 두고자 하는 의도가 있습니다.또 다른 견해는 중국에서 잘 인정하지 않는 삼국사기,삼국유사와 같은 한국측 사료를 인정하면서 해부루가 가섭원에 가서 동부여를 세웠다는 신화를 사실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즉,왕위 계승 과정에서 하나의 부여가 해모수의 북부여와 해부루의 동부여로 갈라졌다고 보는 것입니다.동부여의 위치는 동옥저의 북부로 현재 허천강(함경남도에서 발원하여 압록강으로 흘러 드는 강) 유역에서 동해에 이르는 지역으로 보았습니다. 부여와 북부여 그리고 동부여와 3세기경 부여 세력권 중국의 고조선,고구려 왜곡 및 역사 지우기와 마찬가지로 동북공정 이후 부여사 연구는 현도군, 모용선비, 동한과의 관계에 집중했는데 진대까지 부여는 번속체제에 속해 있었다고 보았습니다.
즉,부여는 고구려의 배후에 있다는 점에서 중국 동북지방의 중요한 지방 민족정권이라 보고, 멸망시 최종적으로 중화민족의 한 구성 성분으로 융합되었다고 보았습니다.동북공정에서 부여사를 주로 맡았던 조홍매는 부여가 한의 책봉을 받고 조공했던 사실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광무제부터 한의 번속체제로 편입되었다고 보기도 하는데 부여가 고구려에 비해 중원세력과 화친 관계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부여는 111년 낙랑을, 167년에는 현토군을 공격하여 한과 대립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시기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중국학자들은 부여의 중원 왕조와의 관계를 "조공과 책봉 맞 군사투쟁관계"로 보기도 합니다.그렇다면 고조선이나 고구려와는 달리 잘 알려지지 않은 부여의 고고학적 문화는 어떨까?
1-3.부여의 고고학적 문화로 바라본 한민족과의 상관관계
부여의 고고학 문화는 길림시 일대에서 나타나는 한의 철기문화를 부여문화로 이해 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여러 유적에서 발굴된 부여 토기의 제작방법과 장식도안이 모두 중원의 것과 같다는 점에서 부여 문화 유물과 한문화 유물이 공존공생의 관계에 있다고 본다는 것입니다.그러나 부여의 토기는 한 문화 뿐아니라 주변의 다양한 문화 요소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또한 토기를 포함 한 부여 문화에서 한문화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부여의 한에 대한 종속성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너무 짙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나아가 중국이 변강의 소수민족사회까지 모두 중원화하려는 정치적 의도를 충분히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중국학계에서는 기본적으로 예와 맥이 동북지역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것을 인정하면서 이들이 예맥으로 민족적 융합을 통해 성장하는 과정에서 중원 문화의 역할이 컸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예와 맥을 종족적 기반으로 해서 일어났던 부여, 고구려, 옥저 등이 모두 중원의 지방정권이었다는 것으로 귀결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분명한 것은 부여는 우리 한민족 역사지만 중국은 고조선은 단군조선을 지우고 중국인 기자로부터 시작되고 그 뒤를 이은 부여는 지방정권으로 왜곡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1-4.역사 전쟁에서 이미 지고 들어가고 있는 우리나라
우리 한민족의 오천년 역사는 중국 정권과의 투쟁과 전쟁의 역사이기도 합니다.마음이 꺽여있으면 100만 대군으로도 필패하지만 마음이 꺽이지 않는다면 100만 대군도 이길 수 있습니다.우리 역사 고구려는 현실에서 이를 증명해 보였습니다.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문화 전쟁은 싸워보지도 않고 중국의 동북공정에 지고 있습니다.중국은 동북공정 이후 각종 교과서에 우리 고대사인 단군 조선을 지우고 기자조선부터 한민족이 중국에 예속된 국가라고 세뇌시키고 있으며 이런 세뇌는 결국 가깝게는 중국 소수민족의 분열을 막고 미래에는 한반도 북한 지역에 대한 영유권 주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우리는 120여년전에 나라가 힘이 없으면 어떻게 국권을 강탈 당하고 나라 없는 백성이 무기력하게 당하는지 비싼값을 치르고 이미 경험했습니다.그럼에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우리 고대사를 축소하고,중국에 예속 시키는 식민 사학자들의 만행에 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문화를 빼앗기지 않는 것과 우리 고대사를 지키는 것 역시 현재 우리들의 전쟁이자 투쟁이기도 합니다.눈뜨고 코 베는 일이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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